우리는 펜데믹에 적응해야만 했다
새로운 무언가를 습관들인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펜더믹은 우리에게 새로운 일상을 곧바로 습관화하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면 집 문밖을 나설 때 반드시 마스크를 챙기고, 가급적이면 타인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수시로 손을 씻고, 환기, 청소, 소독 등등을 하는 것. 예전에는 그다지 의식하지 않던 여러 가지 일들이 이제는 수시로, 그리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생활 습관으로 우리 삶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내가 중국에 돌아온 후 제일 먼저 습관이 된 것은 매일 아침 중국 내 확진자가 몇 명이나 늘었는지 상하이는 어떤 상황인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날마다 업데이트되던 중국 코로나 통계 자료를 신뢰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상하이는 상당히 안전한 편이기는 했다. 하지만 확진자가 내가 살고 있는 지역 혹은 멀지 않은 지역에서 카운터 될 때는 최근 내 경로를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그런 날은 하루 종일 괜한 불안감이 멈추지 않았다.
입국 후 한동안 매일 밤낮으로 가족, 지인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어떻게 지내는지, 별일은 없는지, 중국은 어떤 상황인지 다들 궁금해했다. 무척이나 긴장하며 중국에 들어온 것에 비해 내 주변에서는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사실 별일이 벌어지기 힘든 상황이기도 했다. 바깥출입 자체를 최대한 자제했기 때문이다. 상하이로 돌아온 후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잠시 잠깐 집 문밖을 나선 일이 있다면 강아지 소변을 누이거나 집 앞 슈퍼에서 물건을 사 온 것뿐이다. 아파트 주민이 확진된 것이 아니라면 크게 불안할 필요가 없음에도 항상 마음을 졸이며 있었다.
나중에 중국에 체류 중이던 다른 한국인과 외국인들에게 그 당시 어떻게 시간을 보내었는지 물어보니, 대부분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외부 출입을 하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고 답했다. 그때의 기억이 흐릿한 이유는 아마도 기억할 만한 일이 없을 수 있겠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기 때문이지 않을까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밖에 나가기를 두려워한 시기였던 것은 분명하다. 일본인 친구 하나는 중국인 친척집에 얹혀살고 있었는데, 코로나 초반 4-5개월 동안 집 문밖을 나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녀가 살던 아파트 단지 관리 사무소는 내가 살던 곳과는 달리 출입에 대해서는 까다롭게 굴지는 않았다고 했다. 단지 그녀의 친적들이 생활에 필요한 모든 일을 처리했고, 외국인인 그녀가 밖에서 곤욕을 치르는 일이 혹시나 발생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외출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그 친구가 4-5개월 동안 집에만 있었다는 말에 상당히 놀랐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 생활이 견딜만했으며 오히려 힐링된 시간이었다고 했다. 그 기간은 자신의 삶에 주어졌던 가장 긴 휴식 시간이었고, 좋아하는 게임도 정말 원 없이 실컷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다른 지인은 중국에서 한국으로 들어가며 2주간의 격리 생활을 하였는데, 자신은 격리가 체질인 것 같으며 인터넷과 생활 유지가 가능한 비용만 계속 주어진다면 평생 할 수도 있겠다고 말했다. 생각 외로 격리나 고립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 중 한 사람은 될 수는 없었다. 나는 한 편으로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지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 힘들었다. 코로나에 갇혀 타지에서 반복되는 무기력한 오늘과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조차 알 수 없는 내일의 삶에 대한 두려움에 뒤엉켜 매일이 더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아파트 단지에 주민들을 위한 위챗 그룹 채팅방이 존재한다. 단지 주민 중 어떤 사람의 부모님이 상하이 근교에서 농사를 지어 어디론가 납품을 하신다고 했다. 그러나 펜데믹의 영향으로 채소들의 판로가 막히게 되었다며, 혹시 우리 아파트 단지에 자기네 채소를 구매할 의사가 있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전날 미리 주문을 해주면, 본인이 일을 마치고 저녁시간에 부모님 집에 들러 야채들을 가져오겠다고 했다. 이 사람은 곧 위챗에 별도로 대화방을 하나 열었고, 매일 부모님 밭과 그곳 채소들의 사진과 동영상을 그룹채팅방에 공유했다.
나도 그 대화방에 참여했다. 그룹채팅방 자체가 흥미롭기도 했고 채소를 정말 한번 사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막 시작했을 때는 채소 가격이 정확히 정해지지 않았다. 판매자인 당사자도 가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기색이었는데, 판매 첫날에는 우리들에게 얼마를 받아야 좋을지 물어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민 중 한 사람이 얼마 전 시장에서 대략 얼마에 샀다고 귀띔해주니, 그것보다는 살짝 싸게 물건을 내어 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후에는 시장 시세를 반영해서 중량당 가격으로 책정되어 매일 고지되었다.
남방지역 중국인들이 먹는 채소 중 어떤 것은 꽤나 낯설다. 그 사람이 판매했던 채소들은 그런 류가 꽤 많았다. 가끔은 몇 가지 내가 먹을 수 있는 채소들도 올라오기는 했다. 그러나 주저하고 망설이다 늘 구매 타임을 놓쳐버렸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더 이상 이 그룹 채팅방에 올라오는 글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이들의 존재를 잊어갈 즈음 저녁 무렵에 강아지 산책을 시키느라 아파트 단지 안쪽 벽을 따라 나 있는 도로를 걷다 보니 승용차 한 대가 차 뒤 트렁크를 열어놓고 그 안에 채워져 있던 채소들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발견했다. 아마도 그 사람이겠거니 짐작했다.
나에게는 한국에서 데려온 강아지와 중국 스트리트 출신으로 우리 집을 삶의 터전으로 살고 있는 집반길반 고양이가 있다. 집으로 돌아온 나를 반기는 그들을 보니 잠시 안도감이 느껴졌다. 앞서 말했던 중국인 직원이 나의 부재 동안 그(강아지)와 그녀(고양이)를 돌보아 주었다.
사람인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시간을 야외에서 보내는 고양이와 산책이 밥 먹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강아지. 이들 동물 친구들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스러웠다. 제일 고민스러운 것은 강아지의 산책 문제였다. 밖에 나가도 되는 것인지, 그러니까 사람의 안전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닌지, 그때만 해도 이 전염병이 어떤 식으로 옮기게 되는지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고, 주변 사람들 중 간염자가 있는지 없는지 확실히 구분할 수 있다는 생각(혹은 믿음)도 들지 않았기 때문에, 강아지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냄새를 맡고, 쉬를 하는 동안 그의 몸에 바이러스라도 묻혀서 오게 되면 어쩌지 같은 걱정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중국에서 일 혹은 학업 때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보통 춘제 연휴기간에는 고국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중국으로 돌아온다. 2020년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연휴를 보내러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코로나 상황을 살피며 중국으로 돌아올 날짜를 정하지 못해 망설이는 동안 국경은 폐쇄되었다(2020.3.28). 심지어 기존에 유효했던 비자조차 모두 취소되고 신규 비자발급은 무기한 보류되었다. 정말 상상도 못 해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중국으로 반드시 돌아와야만 했던 사람들조차도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고 중국에서 반려동물과 함께 생활하던 사람들 또한 타향에서 이룬 작은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재중 한인 카페에는 우리 강아지, 고양이 찾아주실 분, 잠시 보살펴주실 분, 한국으로 돌려보내 주실 분 등 도움을 구하는 글들이 한참 동안이나 올라왔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는 숲이 우거지고, 단지 조경이 잘 되어있다. 공원 안에 아파트 단지가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환경 덕분인지 단지 안에는 구역 구역마다 길고양이가 꽤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살펴 주었고,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 길고양이들의 삶은 대체로 평화롭고 풍족해 보였다. 그러나 코로나가 시작되고 나서는 사람들은 공포감에 휩싸여 외출을 극도로 자제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길 고양이들의 급식도 중단된 듯하다. 코로나의 공포가(나 스스로 느꼈던) 조금 사그라질 쯤인 작년 봄, 내가 본 동네 길 고양이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3월의 첫째 날 아파트 단지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걸리는 쇼핑몰에 걸어가 보았다. 이곳도 역시나 단 하나의 문만 개방하여 출입하는 사람들을 통제했다. 입구에는 쇼핑몰 보안 관리원이 쇼핑몰로 들어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노트에 신분증 번호와 연락처 그리고 체온을 측정하고 기록하게 했다. 상해에 입국 후 건물로 들어가기 위해 매번 거쳐야 하는 일련의 과정이었지만, 전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어쨌든 쇼핑몰이 개방을 했고, 출입이 가능하니 이제는 상가들이 모두 정상 영업을 시작했나 보다 기대하며 들어갔지만, 여전히 많은 상가들 특히 지하층에 위치한 요식업 관련 업체는 대부분 문을 닫은 채였다.
쇼핑몰의 1층에 있는 스타벅스가 영업 중인 것을 발견하고 들어가 보았다. 출입문 안쪽에 작은 책상이 놓여있었고, 그 옆에 스타벅스 직원 한 사람 서 있었다. 이곳에서도 신상정보를 노트에 기재해야 했고 체온을 확인한 후 손 소독제로 손을 닦고 나서야 매장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커피를 주문하는 카운터 앞 바닥에는 카운터 테이블로부터 1미터를 띄어 노란 선이 있었고, 그 선 밖에서 주문을 해야 했다. 매장 내의 테이블도 1인만 앉을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었는데, 어떤 손님이 의자를 당겨서 그의 일행과 함께 앉으려고 하자, 출입구 앞에 서서 체온을 재던 직원이 황급히 뛰어와 붙어 앉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고 갔다. ‘웃프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펜데믹은 이렇게 우리에게 새로운 생활방식을 요구했다. 비대면, 온라인 수업, 재택근무와 화상회의, 손을 마주 잡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악수 등등. 공동체의 화합과 단결을 의미하던 ‘여럿이, 모두, 다 함께, 함께라서 행복해요’라는 말들은 곧 ‘모두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어둡게 채색되고 있었다.
2월 말경 한국의 코로나 사태가 심상치 않아지자, 3월 1일부터는 출발 도시 상관없이 모든 한국인들은 14일의 자가격리를 하라는 시행령이 내렸다. 이때쯤 내가 사는 아파트 관리 사무실에서 이틀 동안 총 5-6번 전화가 걸려 왔다. 처음에는 모르는 번호라 광고 전화려니 하고 받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아파트 관리 사무실에서 온 것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낯선 이가 "여기는 아파트 관리 사무실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이곳에서 몇 해를 보냈지만 아파트 관리 사무실에서 나에게 직접 전화를 건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마지막이 되었다. 그들은 내가 한국인이 맞는지, 몇 동 몇 호에 사는 것이 맞는지, 언제 입국했는지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나는 2월 4일 날 입국했으며, 지금까지 별문제 없이 지내고 있다고 같은 얘기를 3번 정도 했던 것 같다. 그들의 안도하는 느낌이 수화기 넘어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 후로 상해를 떠나 다른 도시에 갈 때마다 나는 내가 언제 중국에 왔고, 지금까지 계속 줄곧 중국에 있다는 말을 수도 없이 많이 해야 했다. 2020년의 2월 4일은 평생 살아오며 내 생일 다음으로 타인에게 제일 많이 말한 특정 날짜가 되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눈을 감고도 내 여권의 2월 4일 입국 날짜가 찍힌 페이지를 찾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펜데믹으로 중국과 세계로 오가던 항공편의 취소가 연일 발생하고, 중국에 체류 중이던 많은 외국인들이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중국에 발이 묶이게 되는 상황이 연출되자, 3월 1월, 중국 이민 관리국은 코로나 방역기간 중 중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의 거류 허가기간이 만료될 시 자동으로 2개월 연장해주겠다고 발표했다고 했다. 이 기간 내에는 별도의 연장 신청을 할 필요가 없이 중국 내에서 합법적으로 체류하거나 출국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거류 허가기간에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크게 관심갖지는 않았지만 타국에서 체류하는 많은 외국인들에게는 이것만큼 중요한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주상하이 한인 모임 카페에서도 본인들도 자동 연장이 되는 건지, 만료가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관련 문의 글들도 한동안 끊임없이 올라왔다.
2020년 3월 17일 상하이 시정부는 신종폐렴 감염증(코로나19) 방역 강화 조치를 발표했다. 해외전염병 방역 중점국가를 기존 8개국 (한국, 일본, 이탈리아, 이란, 프랑스, 스페인, 독일, 미국) 외에 유럽 8개국(영국, 스위스, 스웨덴, 벨기에, 노르웨이, 네덜란드, 덴마크, 오스트리아)을 중점국가로 새롭게 추가하고, 상하이로 들어오기 전 14일 이내 상기 16개 국가를 여행했거나 체류했던 국내외 모든 인원을 일률적으로 자가 또는 집중 격리 건강 관찰을 실시한다는 공문이 떴다고 했다. 중국 내부적으로는 점차 안정적인 상황을 찾아가는 흐름이었지만, 매일 눈 뜨면 어느 나라에서 또 어느 나라로 어느 바람 많은 겨울날 마른 숲에 번지는 불길처럼 코로나19는 그렇게 계속 전 세계로 옮겨 붙어갔다. 나는 중국과 한국뿐만 아니라 회사일로 거래 중인 나라가 어떤 상황인지 매일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마치 망망대해에서 폭풍을 만난 것처럼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이 휩쓸려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때마다 깊고도 긴 한숨만 나왔다. 그리고 그 불씨 하나가 내 마음에도 옮겨 붙어 서서히 타들어 가는 것 만 같았다.
2020년 3월 23일, 상하이 시정부에서는 모든 해외 입국자들 격리하도록 했다. 이제 적극적인 방어를 시작하는구나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완전한 나만의 착각이었다. 불과 5일 후인 2020년 3월 28일, 중국 정부는 기존 비자 유무와 상관없이 모든 외국인에 대해 전면 입국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다. “외국인 전면 입국 금지라고? 전면? 전면 입국 금지??” 나를 비롯해 중국에서 근무 혹은 사업을 하고 있거나, 공부하는 사람들, 그들의 가족들은 중국 정부의 정책 내용의 사전적 의미 외에 현실의 정황을 이해하고 혹은 납득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날은 영사관으로 정부 관련 부처로 항공사로 수많은 문의 전화가 쇄도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들도 마땅한 답변이 준비되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현대판 이산가족이 만들어졌다.
2020년 3월 12일, 중국 정부는 각 개인들의 건강상태와 행적을 확인하기 위해 방역 큐알코드를 시행하겠다고 했다. 더 이상 노트 위에 개인 신상정보를 기재할 필요는 없어졌지만 큐알코드를 스캔해서 내 건강상태가 그린칼라로 확인이 되어야 쇼핑몰이나 건물 혹은 공공기관 등에 출입이 가능했다. 쇼핑몰, 가게, 은행, 건물, 기차역 등등의 입구 앞에서 방역 큐알코드를 읽느라 서성거리는 사람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사실 누군가가 나의 행적을 모두 꿰뚫어 본다고 생각하니,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든 그리 달가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남의 나라에서 살아가야 하는 외부인들은 달리 어쩔 방도도 없었다. 어쩌면 나도 이것이 누군가로부터 시작될지도 모를 전염병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로하며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어딜 가든 ‘네가 외국인이라서 좀 그런데...'라고 할 때, 그린칼라의 내 건강코드를 보여주며, “봐, 문제없잖아”라고 얘기할 수 있었고, 차라리 이게 있어서 외국인으로 중국에서 생활하기는 좀 더 나았던 것 같기도 하다. 큐알코드로 건강상태 증명이 명확해지고 신속해지자 상점들은 빠른 속도로 정상화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일 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나는 중국 상하이에 있다. 외출할 때 제일 먼저 마스크를 챙기고, 공공장소를 출입할 때 체온 측정은 필수가 되었다. 국경을 넘어오고 가는 것은 아직도 제약이 많다. 작년 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코로나19는 ‘날이 더워지면 가라앉을 테지!’, '해가 바뀌면 상황이 좀 나아지겠지!’, ‘백신이 나오면 더는 걱정을 안 해도 되겠지!’, ‘다들 접종을 하다 보면 괜찮아지겠지!’라는 사람들의 기대에 어느 것 하나 부응하지는 않았다. 반복되던 실망은 내가 먼 곳으로의 여행을 기약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
지금은 그저, 이 팬데믹의 어두운 터널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낙담과 좌절조차 우리의 일상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by 이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