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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yoon Oct 23. 2021

여행이 사라진 세상의 봄

펜데믹 시대를 살아낸 여행기획자의 기록 


2020년 2월 7일 멕시코시티 국제공항 


설 연휴 동안의 쿠바여행과 2주 간의 멕시코 답사여행을 마치고 한 달 만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멕시코에서 전용 차량처럼 이용하던 우버 드라이버를 호출해 공항으로 향했다. 멕시코

시티 국제공항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공항으로 전 세계의 비행기와 사람들로 모이는 곳이

다. 세계적인 공항은 늘 그랬듯이 활기차게 붐볐고, 평온했다. 2020년 새해는 중국에서 시작된 

정체모를 바이러스에 대한 불안이 퍼져가던 때이긴 했다. 2020년 1월 23일, 중국 정부는 우한시

를 봉쇄했고, 1월 31일에는 세계 보건기구 WHO가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PHEIC Public 

Health Emergency of International Concern)을 선언했다. 그래도 한국을 떠날 때만 해도 국내 

확진자 수는 한 자리에 불과했고, 쿠바에 머물 때는 아예 인터넷 접속이 어려웠기 때문에 불안 

따윈 없었다. 멕시코에 돌아와 한국에서 마스크를 구하기 힘들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냥 ‘별일이

네’ 하고 넘겼다. 

멕시코에 처음 입국했을 때와는 달리 마스크를 쓴 공항직원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얇은 위생마

스크를 가느다란 실로 간신히 묶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마스크였지만 말이다. 인천행 비행기 안

에는 엷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국인은 한 명도 빠짐없이 황사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고 한 무

리의 수녀님들은 마스크에 우윳빛 비닐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별일 없이 비행기는 멕시코시티를 

떠났고, 나는 도시의 빛나는 야경을 나른하게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다음 여행은 멕시코시티가 온

통 보랏빛으로 물든다는 봄*이 좋을까 아니면 영화 Coco의 실사 버전인 ‘죽은 자들의 날 Día de 

Muertos’** 축제가 열리는 가을이 좋을까. 아무튼 곧 다시 만나자 Hasta luego 멕시코…


펜데믹이 시작되기 전, 마지막 여행이었다. 

영화 코코의 배경이 된 과나후아토 전경(2020.1.30)

* 멕시코는 봄이 시작되는 3월과 4월에는 거리에서 보라색 꽃 하카란다 JACARANDA를 많이 볼 수 있다. 

** 죽은 자들의 날 Día de Muertos 은 죽은 이를 기리는 멕시코 전통 축제의 하나로, 매년 10월 31일~11월 2

    일에 열린다. 2018년에 개봉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 Coco에서는 이 축제를 주요한 모티브로 다루고 있다.


2020년 봄, 세상에서 여행이 사라져 버렸다 


매년 겨울에는 여행여락 회원들과 함께 쿠바, 치앙마이, 라오스 같이 따뜻한 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공식일정(인솔)이 끝나고 여행자들이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면 혼자 시간을 보내다 2월경에 귀국하곤 했다. 어차피 겨울 동안에는 한국에 있어도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여행업계 사람들에게 봄은 한 해의 시작이자 겨울 비수기를 끝내고 돈을 벌어야 하는 시즌이다. 1월과 2월에 걸쳐 있는 설 연휴 여행은 이전 해 가을에 판매된 상품이니 연말부터 다음 해 봄까지 2-3개월은 수입 없이 견디어야 하는 보릿고개인 셈이다. 그래서 여행사의 새해는 엄밀히 말하면 1월이 아니라 봄이 시작되는 3월이라고 할 수 있다. 


봄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상황은 급변했다. 2월 18일부터 대구∙경북 신천지 교회를 매개로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했고, 3월 11일 세계 보건기구 WHO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세계적 대유행(펜데믹)을 선언했다. 약국마다 마스크를 사기 위한 줄이 길게 늘어섰고, 유럽과 미국은 앞다투어 입국 금지와 셧다운 조치를 내렸지만 코로나19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다. 3월 22일부터 한국의 방역당국은 본격적인 ‘사회적 거리두기’ 제도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 방역대책의 핵심인 ‘사회적 거리두기’는 여행의 본질인, 사람들이 모이고 만나고 이동하는 일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당장 4월부터 시작되는 봄 시즌 여행은 모두 취소해야 했다. 이미 참가자 모집이 마감되고 준비가 거의 끝난 국내여행 일정은 취소하고 전액 환불 절차를 진행했다. 해외여행은 취소조차 쉽지 않았다. 외국 항공사와 글로벌 숙박 및 여행 플랫폼은 쏟아지는 예약∙취소 환불 요청에 시스템이 마비될 지경이었고, 간신히 취소 요청을 접수해도 언제 환불을 받을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다. 장기해외여행을 떠난 사람들은 귀국하는 항공편이 취소되어 세계 곳곳의 경유지에서 발이 묶였다. 영화에서나 보던 일들이 매일매일 일어났다. 

그 와중에 나는 2019년부터 준비하던 ‘트래블리더’*프로그램을 2020년 상반기에 시작할 예정이었고, 몇 달 전에는 이태원(해방촌) 인근에 작은 게스트하우스도 오픈해두었다. 2020년에는 여행여락이 좀 더 높게 도약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1인 기업이니 허리띠를 졸라매고 몇 개월만 버티면 괜찮아질 것이라 믿고 싶었다. 나는 생애 처음 겪어보는 세기말적인 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이태원 클럽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한 5월, 휑하게 비어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봄이 화창해지수록 눈에 띄게 썰렁해진 이태원, 해방촌 거리를 지나 남산에 자주 올랐다. 맑고 푸른 하늘 아래 만발한 벚꽃들이 팝콘처럼 터져 흩어졌다. 봄은 어느 해보다 찬란하게 피어나고 있었고, 그렇게 여행은 나의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 여행여락의 ‘트래블리더’는 자신의 취향을 반영한 여행을 스스로 기획하고 이를 공유하고 싶은 이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여행자이다. 


로컬화된 삶에 적응하며 살아가기   


여행을 멈춘 이후 내 삶의 반경은 드라마틱하게 좁아졌다. 페미니스트들의 공유 오피스가 있는 ‘살림이 빌딩’은 집에서 도보로 20분, 자전거로는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사무실로 출근하고 저녁이 되면 퇴근하는 일상을 살기 시작했다. 자주 사무실을 비울 일이 없어지니 건물 옥상텃밭에서 쌈 채소, 허브를 키우며 계절의 변화를 소소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게 되었고, 장거리 여행 때문에 직업병처럼 따라다니던 허리와 발바닥의 통증이 사라졌다. 집, 사무실, 혁신파크 사이를 오가는 일상의 ‘루틴’이 만들어졌다. 아주 오랜만에 ‘루틴’이 있는 삶을 사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1년 내내 코로나로 긴장과 위기가 반복되었지만, 좁아진 작은 내 세상에서 시간은 조용하고 평온하게 흘러갔다. 

여행을 떠나지 못하게 된 2020년부터 옥상텃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여행업계가 초토화되어가면서 걱정스럽게 나의 안부를 묻는 이들에게 어김없이 “잘 지낸다” 고 답했다. 정말 잘 지내고 있어서였다.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장소를 찾아다니는 일은 재미있지만 그만큼 피로도가 높은 일이다. 물론 ‘여행기획자’라는 본업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특수한 상황에 기인하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 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쯤이면 다시 예전처럼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요?” 


코로나는 우리 곁에 2년째 머물고 있고, 2021년이 저물어가는 지금 우리는 '위드코로나'를 준비하고 있다. 이제 다시 국경을 넘어 여행을 떠나게 되겠지만, 아마도 우리에게 익숙했던 코로나 이전의  ‘여행’은 아닐 것 같다. 어쩌면 젊은 시절 배낭을 메고 낯선 곳을 헤맬 수 있었고, 글로벌 관광시스템 덕분에 다양한 선택의 자유를 누렸지만, 여행의 본질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지 않았던 ‘여행의 시대’는 저물지 않았을까? 빛나던 한 시절이 가버렸음이 아쉽지만, 이제는 '여행의 시대' 에 안녕을 고할 준비를 해야겠다.  



by  허나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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