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선물해줘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시간

by 은세유

4년 여만에 대학 친구를 만났다. 꼬야가 뱃속에 있을 때 고속터미널 역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다. 꼬야는 곧 만 네 살 생일을 앞두고 있으니 정말 4년 만이었다. 이번에도 교통이 좋은 고속터미널 역에서였다. 정작 대학 시절엔 같은 과이긴 했지만 반이 달라서 오며 가며 인사하고 몇 마디 나누던 게 전부였는데 우연한 계기로 각자 회사 생활을 할 때 더 가까워진 친구였다. 유럽 여행도, 일본 여행도 함께 다녀오고, 지금의 남편들을 만날 때쯤 연애 상담도 하며 꽤 친하게 지냈더랬다. 한번 보자 보자 하면서도 사는 지역이 아주 가깝지는 않고 둘 다 아이를 키우느라 매여 있는 몸이다 보니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코로나 상황까지 겹쳐 미루고 미루다 보니 어느새 4년이라는 시간이 거짓말처럼 흘러 있었다.


3년가량 아이만 돌보다 오랜만에 회사에 나가 일하는 기분이 어떠냐고, 친구가 물었다. 너무 좋을 것 같다고 했고, 그렇다고 답했다. 남편이 많이 바쁘고 아이가 예민해서 혼자 하는 육아가 외롭고 힘들었다고, 그간의 넋두리를 최대한 생략하고 담백하게 요약했다. 취업을 한 이후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가용할 수 있는 내 시간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아이가 만 두 살 즈음되어 혼자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을 수 있게 되기 전까지 아이와의 식사 시간은 늘 전쟁이었다. 타고난 먹성이 좋지 않았던 아이에게 이유식을 먹이는 일은 지금까지의 육아 중 가장 힘들었던 일 Top 3 안에 들어가고도 남는다. 식사 시간이 다가오면 두려웠다. 피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매번 정성을 담아 이유식을 만들었다. 한 끼 먹이는 데 한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아직 말을 못 하다 보니 배가 고픈데도 못 먹는 건지 배가 부른 건지 알 수 없어 답답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아이 앞에서 별별 쇼를 하고 어르고 달래며 밥을 먹인 후 여기저기 흩뿌려진 밥풀과 반찬들을 닦아 내고 나면 내 입에 제대로 된 밥 한 숟가락 들어갈 시간은 나지 않았다. 내 생일 즈음이었나? 남편이 평소에 제대로 못 먹으니 가장 먹고 싶은 걸 골라 보라고 했다.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라...' 무얼까 무얼까? 거의 번아웃 상태였던 나는 그때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혼자 여유롭게 먹는 밥”


그러니까, 내게 필요한 건 음식 자체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천천히 음식을 음미할 수 있는 시간. 아이 입이 아닌 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딴짓을 하거나 딴생각을 하며 먹을 수도 있는 자유 시간.


홀로 하는 육아는 생각보다 더 외롭고 지쳤다. 내 모든 시간은 기본적으로 아이에게 매여 있었기에 '나를 위한 시간'을 내려면 누군가 '아이에게 할당된 내 시간'을 대신 메꾸어 주어야 했다. 항상 잠이 부족해 미생의 오 차장처럼 눈이 벌겋게 충혈되기가 일쑤인 남편에게 '당신의 시간'을 조금만 나눠줄 수 있냐는 말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회사에 취직한 후 아이 등원 준비는 남편이 맡아주기로 했다. 다행히도 그즈음 남편의 업무량도 조금 줄었고, 야근과 주말 근무가 많은 대신 오전 출근 시간은 여유로운 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머리 묶는 건 정말 자신 없다더니 이젠 아이 머리도 곧잘 묶는다. 옷도 날씨에 맞게 잘 골라서 입혀 보낸다. 남편이 선물해 준 '시간'에 나는 내가 오랜 시간 공부하고 꿈꾸었던 일을 한다.


전에도 남편은 그렇게 힘들면 시터를 쓰라고도 했었지만 '우리 형편에... 게다가 내가 회사를 나가는 것도 아닌데...' 하는 마음에 혼자 꾸역꾸역 어떻게든 해냈다. 그러나 이제는 시터를 고용할 정당한 이유가 생겼으니 하원 후 2-3시간은 시터에게 아이를 맡긴다. 물론 그 후엔 여전히 내 모든 시간이 아이 것이다. 남편은 언제든 원하는 시간에 퇴근하고 저녁 약속을 잡을 수 있지만 나는 일 년 중 단 며칠을 제외하고는 매일 정시에 집에 도착하거나 재택 후 업무를 마치고 아이를 먹이고, 목욕시키고, 재운다. 그래도 전에 비하면 이게 어딘가 싶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어떻게든 아이를 떨어뜨려 놓고 싶어 하는 매정한 엄마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매일 보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도 '뭐 이렇게 예쁘냐'하며 빤히 들여볼 때가 많을 만큼 아이를 사랑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도 때로는 거리가 필요한 법. 혼자 조용한 공간에서 공상하기를 즐기는 내게 그럴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 만난 친구에게 나이 들어 체력이 떨어지지 않냐며 운동은 좀 하냐 물었더니, 일주일에 한 번씩 저녁에 시간을 내어 필라테스를 한다고 했다. 친구는 남편이 저녁 7시에만 오면 평일에 하루 정도는 운동을 할 수 있는데 매일 7시 반 이후에 와서 운동할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남편이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을 하면 조금 불편하긴 해도 퇴근 시간이 단축되어 7시까지 오는 게 가능했다. 그래서 남편에게 일주일에 한 번만 그렇게 해주면 안 되겠냐고 제안했고, 남편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월요일이나 금요일 중 하루는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한다고 했다. 친구는 남편에게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고, 그 시간을 자신의 건강을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 평일 저녁은 물론이고 주말에도 남편이 골프를 치러 나가는 시간마다 친구가 아이를 전담해서 돌보았으므로 일주일에 하루, 한 시간의 시간을 선물해달라고 한 것이 무리한 요구는 아닐 것이다.


얼마 전 내 생일에, 남편이 갖고 싶은 게 무엇이냐 물어서 선뜻 답하지 못했는데 내가 가장 갖고 싶은 선물은 어쩌면 '시간'일지도 모른다. 디폴트 세팅으로 아이에게 할당되어 있는 내 시간을 나에게 돌려주고 남편이 그 시간을 대신 메꾸어 준다면... 한 달에 한두 번 만이라도 나를 위해 그렇게 해 준다면...



평일에 아이가 아빠와 목욕을 하고 잠을 자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고속터미널에서 친구를 만나고 돌아온 나는 둘이 방으로 잠을 자러 들어가자 샤워를 하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항상 둘이었는데 혼자 욕조에 들어오니 조금 어색했다. 뜨거운 물로 몸을 적시고 또 적셨다. 급할 게 없었다. 느긋하게 이런저런 공상도 했다. 머리도 (후다닥 감고 수건으로 말아 올리는 대신) 미용실에서 감겨주는 것처럼 천천히 거품을 내 시원하게 감았다. 아이가 추울세라 아이 몸부터 로션을 발라주고 내 몸에는 대충 바르는 대신, 꼼꼼히 오른팔과 왼팔, 오른 다리, 왼 다리, 손과 발에 로션을 발랐다. 그러고는 물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보송보송하게, 오랫동안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렸다. 이게 뭐라고, 간만에 느끼는 자유와 행복이었다. 근데 이상하다. 아이와의 목욕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 중 하나인데…그래, 그래도 가끔은 이런 시간이 필요해.


갖고 싶은 선물이 뭐냐고? 내게 시간을 선물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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