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삶을 피하자 삶이 시 안으로 들어오네

by 은세유

동네 도서관에서 시 수업을 들은 지 어느새 한 달이 되어 완성된 또는 완성에 가까운 초고를 공유한 후 합평을 하기로 했다. 함께 수업을 듣는 분들의 시가 생각보다 훨씬 좋아서 그날 그때 그곳에서 '시 쓰기 도서관' 포스터를 본 것이 올해 내게 온, 아니 내가 잡은 가장 큰 행운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지난 한 달 동안 수업은 단 4회, 한 시간 반 가량씩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한 달 동안 나는 수업을 듣지 않는 시간에도 시에 대해 생각했다. 마지막 수업의 마지막 십여분은 평생도록 잊지 못할 소중한 깨달음의 시간이었다. 삶이 시 안으로 밀고 들어온 순간을 경험했으니까.




시를 쓴다고 하면 보통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팔자 좋네? 시간이 많은가? 현실감각이 없나(자기만의 세계에서 사나)? 진짜 교양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교양 있어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교양 있어 보이고 싶어 도전하는 다소 엉뚱하고 한심한 일이라고 생각하려나. 참고로 나는 딱히 '팔자'가 좋지도 않고, 시간은 최근 코로나로 일에 지장이 있어 조금 많아진 게 사실이지만 심심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건 아니고, 현실 감각은 상대적으로 적긴 한데 그래도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시를 쓰고 싶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잘 들여다보고 싶어 시에 다가갔다.


요즘 내 주변 거의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는 '집'이다. 40대 즈음에는 막연히 모두가 '안정'이란 것을 찾을 줄 알았기에 사회가 정한 마일스톤(milestone)이 다가오니 문득 불안해진다. 그래서 어떻게든 인간 생활의 기본 요건 의식주 중 하나인 집을 장만하고자 영끌도 하고 심지어 몸끌(?)도 한다고 한다. 일단 어떻게든 무리해서 집부터 산 뒤 그 집을 전세 주고 원룸 같은 데서 월세 살이 하는 게 몸끌이라나.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서 돈을 모으거나, 주식을 한다거나, 부동산 유튜브 강의를 찾아 듣는 게 아니라 시를 쓴다고 하면, '어이구' '쯧쯔' 소리를 듣는 게 일반적이긴 할 것 같다. 내 지인이라면 아마도 '푸하하' '뭐?' '너 답다' 같은 말을 할지도. 그런데 나는 다시 말하지만 삶에서 도망치려고 시를 쓰고 싶었던 건 아니다. 삶을 천천히, 제대로, 잘 들여다보고 싶어 시를 읽고 썼다.


마지막 수업의 마지막 순서는 가장 재미있고 유쾌한 시를 쓰신 분의 합평 시간이었다. 지난 수업 시간에는 마지막 순서로 내 시를 다루었다가 전체적인 분위기가 침울해지는 사태가 벌어져서 선생님께서 이번에는 일부러 마지막에 그분의 시를 배치하신 것 같았다. 수업 시간에 함께 읽었던 안도현 시인의 '스며드는 것'에 영감을 받아 대하구이를 먹으며 1분 만에 쓴 시라고 하셨다.(시를 공유하고 싶지만 허락을 받지 못해 안도현 시인의 시만 공유한다)




스며드는 것


-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쩔 수 없어서

살 속에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이 시에는 슬픔의 감정이 지배적인데 그분의 시는 슬프면서도 유머와 재치가 있었다. 얼굴은 볼 수 없었으나 목소리만으로도 밝고 유쾌한 기운이 전해졌다.


그런데 사실 그분의 처음 주제는 아픈 엄마와 엄마를 바라보는 본인이었다. 그런데 그 바로 다음 주에, 현재 진행형인 상황을 마주하기가 힘들어 가벼운 소재로 바꾸었다 하셨다. 수업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그분은, 주제를 바꾸었다 생각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원래 쓰려고 했던 그 주제가 이 시에 담긴 것 같다 하시며 평소와 달리 촉촉해진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얼마 전 장례식에 다녀왔다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셨는데 그게 아마 엄마의 장례식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힘든 투병을 하는 엄마가 눈밭처럼 하얗게 깔린 소금 위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 널뛰기하는 새우로, 그 모습을 그저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이고 바라봐야 하는 본인이 화자로 그 시에 스며든 것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신형철 평론가의 칼럼 '시를 쓰는 사람은 많지만 시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를 읽게 되었다.

'시가 삶을 피하자 삶이 시 안으로 들어오네'라는 문장이 마음에 꽂혔다. 대하구이를 쓴 그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창동 감독 <시>


시를 쓰지 않았더라면 계속 짊어지고 가기에는 너무 버거운 삶이, 너무 무거운 슬픔이, 너무 딱딱해 열어볼 수 없는 마음이 그를 오랫동안 힘들게 했을지 모른다고 감히 생각해본다. 삶이 시 안으로 밀고 들어와 준 덕분에 어쩌면 평생 알 수 없었을 감정들을 담담하게 펼쳐볼 수 있게 된 건 아닐까. 말랑해진 감정들을, 글자들을 햇볕에 말리다 보면 촉촉해진 목소리와 눈가도 어느새 마를 수 있기를, 조용히 바라본다.





<글의 제목은 본문에 언급한 것처럼 신형철 평론가의 칼럼에서 빌려왔습니다>

삶을 피하자 삶이 시 안으로 들어오네 시가 삶을 피하자 삶이 시 안으로 삶을 피하자 삶이 시 안으로 들어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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