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피고인의 거짓말

<앵무새 죽이기>의 애티커스 핀치처럼

by 은세유

올해 세 살인 딸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둘 다 깨끗하게 손 씻기다. 손을 씻자마자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아이의 가방을 열어본다. 선생님이 알림장에 뭐라고 써 주셨을지 궁금해서다. 밥은 잘 먹었는지, 뭐 하고 놀았는지, 아이가 놀이에 어떻게 참여했는지 등이 적혀있다.


오늘은 강당 놀이터에서 징검다리 건너기를 했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서워했는데 꼬야는 아주 신나게 건넜답니다.


만 2세가 되기 전, 가정 어린이집에 다닐 때는 워낙 낯가림도, 엄마 애착도 심한 아이라 중간에 불려 간 적이 많았다. 알림장을 읽고 얼굴이 어두워질 때도 종종 있었다. 낮잠 시간에 너무 일찍 깨 엄마를 찾는 바람에 다른 아이들도 깼다거나, 친구를 꼬집었다거나.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 나이 대 아이들은 길들여지지 않은 새끼 호랑이들 같아서 한 아이가 꼬집기 시작하면 다른 아이들도 그 행동을 따라 했고, 우리 아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3세가 되어 국공립 어린이집에 다닌 후로는 아이들끼리 서로 때리거나 꼬집거나 무는 행동에 대한 보고는 거의 받지 않았다. 그새 아이들은 훌쩍 자라주어 이제 장난감을 뺏거나 고집을 부리기는 해도 무작정 친구를 때리거나 소리를 지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알림장에 적힌 선생님의 글씨가 유난히 빼곡했다.

오전에 은지가 종이 벽돌을 높게 쌓아놨는데 꼬야가 발로 차서 무너뜨렸어요. "꼬야야, 그러면 은지가 속상하겠지? 우리 사과할까?" 하니까 "사과하자!" 해놓고는 은지 앞에 가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더니 지적을 한 교사에게 서운했는지 눈시울이 붉어졌어요. 결국 사과는 하지 않았어요. 오후에 잘 놀고 나서 "꼬야야, 아까 왜 은지 종이 벽돌 무너뜨렸어?" 하니까 멋쩍은 듯 그냥 웃기만 하네요.


취재원 비닉(protection of sources)에 따라 정보원인 선생님을 보호하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이에게 물었다.


"꼬야 오늘도 친구들하고 사이좋게 잘 지냈어?"

"응!"

이렇게 나오면 문제 해결이 까다로워진다. 친구에게 일부러 피해를 주거나 친구를 아프게 한 행동에 대해서는 가정에서도 반드시 다시 한번 안된다고 가르쳐주려고 하지만, "거짓말 마. 너 오늘 은지 장난감 무너뜨린 거 다 알아!" 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결국 '실토'하게 해야 하는데 더 어릴 땐 술술 잘 '불더니' 요즘은 잘한 행동 중심으로만 말하고 들으려 한다. 우리 어른들처럼...


몇 번이나 상황을 재연해보며 아이가 스스로 말해주길 기다렸지만 이번엔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저녁에 아이와 블록 놀이를 했다.

"꼬야야, 친구랑 이렇게 놀다가 꼬야가 실수로 건드려서 친구 블록이 망가졌어. 그럼 어떻게 말해야 할까?"

아이는 '나 정답 알아요. 저요 저요!' 하는 의욕에 찬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친구야! 발로 차서 미안해! 다음부터 안 그럴게!!!"

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응? 발로 찼다는 말은 안 했는데? 요 꼬맹이! 잡았다!'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의 명장면이 떠올랐다.


미국에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시절 정의로운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는 쓰레기장에 사는 백인 여성을 폭행하고 강간했다는 모함을 받은 흑인 톰 로빈슨을 변호한다. 애티커스는 톰이 장애가 있어 왼손을 전혀 쓸 수 없는 불구자임을 밝혀낸다. 물리적으로 피해자의 오른쪽 눈두덩을 가격하고 목을 조를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피해자의 아버지 유얼이 왼손잡이라는 사실도 알려진다.


"당신은 왼손잡이군요, 유얼 선생." 테일러 판사가 말했다. 화가 난 유얼은 판사에게로 돌아서서 왼손잡이가 뭐 어떻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You’re left-handed, Mr. Ewell,” said Judge Taylor. Mr. Ewell turned angrily to the judge and said he didn’t see what his being left-handed had to do with it.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이 장면은 특히 통쾌하고 스릴 넘쳐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끝까지 입을 열지 않던 꼬맹이가 "발로 차서 미안해"라고 말하는 순간, 결정적 증거를 잡은 애티커스 핀치가 된 듯 희열을 느꼈다.


"맞아, 맞아. 친구 장난감 무너뜨리면 그렇게 말해야 하지?" 하니 맞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다행히 그 일이 있은 후 지난 몇 달간 친구 장난감을 발로 차거나 망가뜨렸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