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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Nov 26. 2019

오빠의 티셔츠

'82년생 김지영' 23쪽

김지영씨는 1982년 4월 1일, 서울의 한 산부인과 병원에서 키 50센티미터, 몸무게 2.9킬로그램으로 태어났다. 김지영씨 출생 당시 아버지는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주부였다. 위로 두 살 많은 언니가 있었고, 5년 후 남동생이 태어났다. 방 두 개에 마루 겸 부엌 하나, 화장실 하나인 열 평 남짓 단독주택에서 할머니와 부모님, 삼 남매, 이렇게 여섯 식구가 살았다.


김지영씨에게 남은 가장 오래된 기억은 남동생의 분유 가루를 먹던 장면이다. (82년생 김지영, 23쪽)


으으으... 엄마도 돌아가시고 왕래하는 친척도 없어서 기본 정보가 없다.


김동진씨는 1976년 *월 *일(몰라서 비운 것이 아니라 일부러 생략), 인천에서 태어났다. 말이 인천이지, 엄마 아빠 오빠를 포함한 김동진씨네 가족은 계속 서울에서 살았고, 김동진씨를 김동진씨의 이모네 집에서 출산하러 그 때만 인천에 가서 낳은 것이기 때문에, 김동진씨의 엄마는 김동진씨가 서울에서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출생 당시 아빠는 은행원이었고 엄마는 주부였다. 위로 두 살 많은 오빠가 있었다. 김동진씨의 기억으로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 안에서 자주 이사를 다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파트 전세를 살면서 기간이 만료되면 전세가가 좀 덜 오른 집으로 이사를 다닌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아이들의 학교를 전학시키지 않기 위해 아파트단지 안에서만 이사를 다닌 것이다.


김동진씨의 오빠와 관련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오빠의 티셔츠를 물려받아 입던 것이다. 오빠의 옷들 중에서 너무 남자같은 옷은 입지 못했지만, 조금만 남자같은 옷들 중에서 상태가 좋은 것들을 엄마가 김동진씨에게 입으라고 주었고, 김동진씨는 조금 마음에 안 들었어도 군말없이 입고 다녔다. 최초의 자각은 중학교 때 친구가, '너 이거 오빠거지?' 라고 하면서 네 옷 중에 못 보던 건데 조금 남자같은 옷은 오빠 옷이라고 콕 집어 지적하던 때였다. 그제서야 조금 엄마에게 서운한 느낌이 들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김동진씨는 어릴 때 예쁜 학용품이 생기면 모아놓고 아껴두고 쓰는 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오빠가 와서 예컨대 지우개가 없다며 지우개를 달라고 말하면 김동진씨는 그냥 주곤 했다.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왠지 주어야 할 것 같아서 빼앗기는 마음으로 억지로 물건들을 오빠에게 주었다. 오빠가 또 동생에게 가서 동생이 모아둔 예쁜 학용품을 거의 갈취하듯 가져간다는 사실을 엄마가 알았지만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아빠가 알았을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엄마는 항상 오빠를 먼저 생각하고 오빠를 위해주었다. 김동진씨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엄마 말에 순종하며 살았다. 엄마가 너무도 엄격하고 무서워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김동진씨가 살면서 엄마에게 요구한 것이 딱 두가지 있었다. 하나는 로얄젤리이다. 은행 지점장이었던 아빠가 어느 날 누군가에게 선물받았다며, 수험생에게 좋다고 들었다며, 로얄젤리 한 병을 집에 가져왔다. 그 때 당시 중3이었던 김동진씨는 평소에는 모든 걸 오빠에게 양보했지만 왠지 그 로얄젤리만큼은 갖고 싶었다. 그 때 김동진씨의 오빠는 고2였다. 내가 중3이니까 내가 수험생이고 따라서 내가 로얄젤리를 먹어야 한다고 김동진씨는 그 날만큼은 입을 떼어 말했지만, 엄마는 못 들은척 무시하고 그 로얄젤리를 오빠에게 주었다. 무서운 엄마 밑에서 저항하면 죽는다는 것을 이미 몸으로 터득한 김동진씨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아니 적어도 김동진씨에게는 몇 년처럼 느껴졌다. 엄마와 김동진씨가 오빠의 방 정리와 청소를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방 주인은 어디 가고 엄마와 여동생이 오빠 방을 청소했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그러고 있을 때였다. 오빠 방의 더러운 물건들 버릴 물건들을 모아놓은 더미 사이에 그 로얄젤리 병이 나왔다. 그 어느 날 김동진씨가 나에게 달라고 유일하게 주장했던 바로 그 로얄젤리. 엄마로부터 로얄젤리를 받은 오빠는 하지만 로얄젤리를 하나도 먹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엄마는 '먹으라고 줬더니 하나도 안 먹었네. 옛다, 너 먹어라' 하며 로얄젤리 병을 김동진씨에게 휙 던져주었다.


내가 그 로얄젤리를 먹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 자리에서 싫다고 엄마에게 말했는지 아니면 나중에 조용히 버렸는지까지는 기억이 나지 안는다. 다만 로얄젤리를 달라고 말했을 때 한 번, 오빠 방 정리하다 나온 로얄젤리 병이 내 앞에 휙 던져졌을 때 한 번, 무척이나 자존심상했던 것은 기억이 난다. 나의 인생은 오빠의 수발드는 인생이었다. 어려서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 엄마에 의해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래서 오빠랑 진정으로 친하게 지내거나 할 수도 없었다.


지금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는 큰아이에게 언니니까 무조건 양보하라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아마 큰아이는 무의식중에 그렇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내가 둘째여서 오빠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둘째아이에게는 감정이입이 엄청 잘 된다. 언니와 싸워서 둘째가 울면 그렇게 마음이 아프다. 다른 아줌마들과 얘기하다 보니, 나 말고 다른 엄마들도, 본인의 출생순위에 따라 아이들을 이해하는 정도가 나처럼 다르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는 의도적으로 큰아이의 편을 들어주려고 노력하는데, 그러면 또 둘째아이가 서러워 울어서 사실 어떻게 하는 것이 잘 하는 것인지 명확히 알겠는 때보다 모르겠는 때가 더 많다. 언젠가 큰아이에게, 엄마가 둘째였어서 첫째들의 삶을 잘 몰라서 너를 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는 걸 알고 있어달라, 엄마만 그런 건 아니고 다른 엄마들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라고 얼핏 말해주기는 했던 것 같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갈수록 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는 일이다. 다만 나의 엄마의 그림자가 나에게 드리워져 있어서 그 그늘이 아이들에게까지 미치지 않도록 매일매일 매 순간마다 부단히 노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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