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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Nov 28. 2019

그리고 자매의 방이 생겼다

'82년생 김지영' 48쪽

그리고 자매의 방이 생겼다. 가장 큰 방은 부모님과 막내동생이 썼고, 다음으로 큰 방은 김지영씨와 언니가 썼고, 가장 작은 방은 할머니 방이 되었다. 아버지와 할머니는 전처럼 자매와 할머니가 한 방을 쓰고, 남자애가 따로 방을 써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지만 어머니는 확고했다. 연세도 많으신 할머니를 언제까지 손녀들과 같은 방을 쓰시게 할 거냐며, 혼자 편하게 라디오도 듣고 불경도 들으면서 낮잠 주무실 수 있게 방을 따로 내드려야 한다고 했다. ...... 어머니는 자매의 방을 꾸며 주려고 아버지 몰래 돈을 따로 모아두었다고 했다. ...... 1년 후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할머니 방은 남동생의 방이 되었다. 하지만 남동생은 꽤 오래 밤마다 베개를 끌어안고 엄마 품으로 파고 들어와 잠들었다. (82년생 김지영, 48-49쪽)


그랬구나. 82년생 김지영씨도 방 문제가 이슈였던 적이 있었구나. 세월이 지나도 절대 잊을 수 없는 나의 방 이야기를 나는 주욱 이어 써보려고 한다.


김동진씨가 기억하는 한 김동진씨 가족은 아파트에 살았다. 초등학교 정도의 기억부터 늘 아파트였고, 여러 번 이사를 했어도 한 번도 아파트를 벗어난 적은 없었다. 아파트여도 남향과 북향이 있었고, 방 중에도 남향 방과 북향 방이 있었다. 오빠의 방은 항상 남향, 김동진씨의 방은 항상 북향방이었다. 오빠의 방은 항상 햇빛이 잘 들고, 그래서 실제로도 따스하고 분위기도 따스했다. 반면 김동진씨의 북향 방은 일단 해가 들지 않아 언제나 약간 어두웠고, 언제나 약간 추웠다. 아마 같은 온도로 방들에 난방이 되어도 볕이 잘 드는 방은 따뜻해서 온도가 올라갔기 때문에 항상 김동진씨의 북향 방은 오빠의 남향 방보다 추웠으리라.


넓은 평수 좋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도 김동진씨의 방은 북향이었다. 엄마는 나름대로 베란다를 터서 방을 넓게 쓸 수 있도록 해 주었지만, 외벽과 붙어있는 침대에 누우면 어떤 추운 날에는 코가 시려웠다. 그 방엔 또 나름대로 거대한 창문이 있어서 북향의 어두침침함을 조금은 커버해주었지만, 그 대신 바람이 들어와 더 춥고 상대적으로 오빠의 방은 더 작았어도 훨씬 더 따뜻했다. 김동진씨는 지금도 기억한다. 넓지만 조금 썰렁 했던 김동진씨의 방에서 나와 뭔가 볼일이 있어서 오빠의 남향 방으로 갔을 때 느껴지던 별천지같은 느낌을. 햇살이 방 안까지 비추어지고 방 안의 모든 것이 따스했던 그 느낌을.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김동진씨는 살면서 딱 한 번 엄마에게, 나에게 남향 방을 달라고 주장했던 적이 있었다. 수험생용 로얄젤리와 함께 남향 방은 김동진씨 인생에서 달라고 주장했던 단 두가지였다. 그러나 엄마는 여전히 김동진씨의 주장을 묵살했고, 이사를 가면서 역시 오빠에게 남향 방을 주었다. 


김동진씨네는 꽤 자주 이사를 다녔다. 초등학교 때는 같은 아파트단지 내에서 여러 번 다녔던 것 같고, 전세를 탈출하여 집을 산 후에 그 집에서 좀 오래 살다가, 그 집보다 더 크고 좋은 40평대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그 좋은 집에 사는 동안 잘못 선 보증 때문에 아빠는 실직했고, 역시 잘못 들은 보증 때문에 집이 경매에 넘어가게 되어 김동진씨네는 다시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갔고,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 이사를 한 번 더 갔다.


언제인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김동진씨가 성인이 된 후 이사를 갈 때, 엄마는 그때만큼은 김동진씨에게 남향 방을 주었다. 남향일 뿐 아니라 그 집에서 제일 크고 좋은 안방이었다. 하지만 김동진씨는 이미 그 동안의 경험 때문에 시니컬해져 있어서, 본인에게 갑자기 떨어진 남향 방이 고맙지도 않았다. '내가 달랄 때는 안 주고 왜 이제와서 이러나' 라는 원망도 들었다. 그리고 대학생인지 대학원생인지였던 김동진씨는 학교에 다니고 집 밖에서 볼일을 보느라 바빠서, 그 방에 들어오는 햇빛과 그 방의 온도를 감상하고 즐길만큼 방에 오래 머물러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 남향 방 생활도 어느 날 오빠로 인해 갑자기 끝나버렸다. 몸이 약했던 김동진씨의 오빠는 고3때 한 번, 2년 뒤 대학 신입생이 되었을 때 한 번, 기절하여 쓰러진 적이 있었다. 딱히 병명은 없었다. 김동진씨가 남향 방을 쓸 당시 대학원에 재학중이던 오빠는 어느 날 또 기절하여 쓰러졌다. 오빠가 쓰러진 것이 마치 김동진씨가 남향 방을 차지하고 있고 오빠가 춥고 어두운 북향 방을 썼기 때문이기라도 한 양, 병원에 입원했던 오빠가 퇴원해 돌아오자마자 김동진씨의 엄마는 김동진씨와 오빠의 방을 바꾸어버렸다. 역시 이미 시니컬한 김동진씨는 '그러면 그렇지'라고 생각했다.


미국의 대학에서 박사과정 공부를 하면서 처음으로 여성학을 공부했던 김동진씨가 제일 처음 수강했던 과목은 'Gender & Geography'였다. 젠더와 지리학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었지만 시간표가 맞는 유일한 과목이라 수강하게 되었다. 생애 첫 페미니즘 수업이었던 그 강의실에서 김동진씨는 자신의 그 북향 방의 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았다. 지리라고 하는 것, 위치라고 하는 것, 건물이나 공간의 배치와 같은 것들, geogrpahy라고 하는 넓은 범위 안에 포함되는 많은 것들이, 바로 젠더 권력관계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배운 바로 그 수업에서, 자신의 경험을 서술하는 과제로 김동진씨는 북향 방의 경험을 써 냈다. 나중에 피드백된 과제물을 찾으러 갔을 때, 뿔테안경을 쓴 자그마한 키의 캐나다인이었던 데비언 교수는 바로 그런 성찰이 자신이 과제를 냈을 때 원했던 그런 종류의 경험과 성찰이라며 김동진씨의 과제를 칭찬해주었다. 너무 사소한 것 같아서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그 경험이 꺼내어지고 인정받는 기분, 그 경험을 설명할 언어를 발견한 그 기분은 정말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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