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진 Nov 23. 2019

추석이 되어 시가에 갔을 때

'82년생 김지영' 15쪽

추석이 되어 시댁에 갔을 때 일이 터졌다. 정대현씨가 금요일에 휴가를 냈고, 세 식구는 아침 7시에 집에서 출발해 다섯시간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정대현씨의 부모님과 점심을 먹은 후, 오랜 운전으로 지친 정대현씨는 낮잠을 잤다. 


...... 김지영씨는 점심 설거지를 해 놓고 커피를 한잔 하며 잠깐 쉬다가 시어머니와 함께 추석 음식 재료들을 사러 시장에 다녀왓다. 저녁부터는 사골을 우리고, 갈비를 재고, 나물 재료를 손질해 데쳐 일부는 무치고 일부는 냉동실에 넣어 두고, 전과 튀김을 만들 채소와 해산물들을 씻어 정리해 두고, 저녁밥을 차리고 먹고 치웠다.


다음 날, 김지영씨와 정대현씨의 어머니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을 부치고, 튀김을 튀기고, 갈비를 찌고, 송편을 빚고, 중간중간 밥을 차렸다. 가족들은 막 만들어진 명절 음식들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82년생 김지영, 14-15쪽)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김지영씨네 시가의 명절풍경은 나의 것에 비하면 참 단순하다고 느껴졌다. 아니면 단순하게 쓴 작가의 힘인 건가. 나는 미국 유학생활 중 귀국한 이후로 결혼 이후 11년째 한국에서 명절을 맞으며 살고 있다. 김지영씨네 사정처럼 자세하게 쓰자면 끝도 끝도 없기 때문에 아주 간단하게만 쓰자면. 일단 그동안의 11년 동안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어쩔 수 없는 단계적 변화라고 해야 하나.


김동진씨의 시아버지는 3형제 중 둘째로, 그 중 첫째형님 집에서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김동진씨는 시가에 가도 시가의 큰댁으로 명절노동을 하러 갔다. 11년 전 처음으로 결혼 후 명절을 한국에서 보낼 때는, 김지영씨처럼 명절 이틀 전에 시가에 가서 자고, 명절 하루 전에 시 큰댁에 가서 하루종일 명절 노동을 하고, 명절 당일에는 제사를 지냈다. 시 큰댁에는 시어머니, 남편, 아이들과 함께 간다. 시아버지는 가봤자 할일도 없고 재미도 없다며 본인의 형님 집에 명절 전날에는 가지 않는다. 시 큰댁에는 아주버님들이 세 분이 있고, 원래는 형님들 세 분이 있었다. 몇 년 간격을 두고 차차 한 분씩 집을 나가서 지금은 셋째형님만 남았다.


3형제 중 막내인 시 작은아버지는 서울에 사시는데, 부인과 자녀들과 함께 명절 전날 오후쯤에 시 큰댁으로 오신다. 명절 전날 여자들은 하루종일 음식을 한다. 보통 오전에는 각종 전을 부치고, 그러다가 거기 모인 남녀노소들의 점심을 차려 먹고 치우고, 오후에는 송편을 빚거나 만두를 한다. 남자들은 텔레비전을 보다보다 하다하다 할 일이 없어서 마당에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는다. 송편이나 만두를 다 끝내고 나면 여자들도 마당에 나가 고기를 먹는다. 고기를 먹기 때문에 배가 고프진 않지만 그래도 저녁을 먹는 사람들이 있어서 저녁을 차리고 치운다. 그러고 나면 김동진씨는 김동진씨의 오리지널 시가로 다시 돌아간다.


하룻밤을 오리지널 시가에서 또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시 큰댁으로 간다. 이미 부엌에서는 여자들이 제사음식을 다 해놓았고 막 차리고 있다. 김동진씨는 제사음식을 차려내고, 제사가 끝난후 치우는 일을 거든다. 제기는 바로 설거지를 해서 마른행주로 닦아 상자에 차곡차곡 담아두어야 한다. 제사지낼 때는 직계가족이 아닌 친척들도 온다. 상에 음식을 차려내는데, 집이 좁다는 핑계로 여자들은 남자 및 어르신들과 한 상에서 밥을 먹을 수 없다. 남자들이 다 먹고 나면 반찬을 다시 조금 덜어서 그 상에서 여자들이 밥을 먹는다. 그러고 나면 폭풍설거지를 하는데, 김동진씨가 언젠가 인원수를 헤아려보니 남녀노소 모두 합해서 약 60명분 설거지다.


제사를 지내고 나면 남자들과 남자인 아이들은 산소에 다녀온다. 누구의 산소인지 어디에 있는지 김동진씨는 알지 못한다. 그들이 산에서 돌아오면 누군가가 인사를 드리러 온다. 김동진씨는 그들이 누군지 알지도 못하고 그들도 김동진씨에게 자기소개를 하지 않는다. 김동진씨는 주방에서, 큰어머니가 시키는대로 다과상을 내가는 일을 돕는다. 그때쯤에 짬이 나서 주방에 앉아 커피 한 잔을 하며 여자들과 수다떠는 시간이 유일하게 여유로운 시간이다. 보통 서울에서 내려온 작은어머니, (방에 들어가 잠자지 않는다면) 셋째형님, 5촌당숙 아줌마, 보통은 이 정도가 부엌에 모인다. 김동진씨의 시어머니는 오래 전부터 명절 당일에 큰댁에 가지 않는다. 이유는 본인이 아침을 금식하고 하루 두 끼만 먹는데, 아침먹는 사람들 틈에서 할 일이 없다는 이유다. 


큰형님이 집을 나가기 전에는 그러고 있다가 점심까지 해먹고 치우고 나왔다. 큰형님이 없은 후로는 점심은 먹지 않고 나온다. 아무튼 아침 노동을 마치고 나면 다시 오리지널 시가로 돌아온다....... 그 이후는 말하고 싶지도 않다. 오리지널 시가로 돌아와 뭉개다가 하룻밤을 더 자고, 다음날 저녁까지 먹고 가라는 시어머니의 간청을 뿌리치고 오후에 돌아온다.


김동진씨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 아빠는 김동진씨가 스물다섯살 때, 엄마는 김동진씨가 서른다섯일 때 돌아가셨다. 김동진씨의 엄마는  김동진씨의 친가와 외가 즉, 엄마 본인의 시가와 친정 식구들 모두와 사이가 매우 안 좋았고, 따라서 김동진씨도 친가와 외가 친척들과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부모님도 안 계신데 이제 와서 명절이라고 누구를 찾아가는 것도 어색하다. 하나뿐인 오빠는 엄마가 돌아가실 때 (김동진씨와 오빠에게는 적지 않지만 객관적으로는 절대로 많지 않은) 엄마 유산 분배 문제로 싸운 후에 연락을 끊었다. 캐나다로 이민을 간 것 같은데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아무튼 그래서 김동진씨는 명절에 찾아갈 친정이 없다. 


내가 김지영이라면, 내가 빙의한다면 누군가로 어느 시점쯤에 빙의를 할까. 내가 작가는 아니지만, 명절노동중이던 그 특정한 시점에, 김지영씨의 친정어머니라는 특정한 인물로 빙의하도록 한 것도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럼 저 위 김동진씨의 이야기에서 김동진씨는 어느 시점에 누구로 빙의해서 무슨 말을 쏟아낼까. 아니면 빙의 따위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사그라질까. 왜냐면 이 시점의 빙의는 김지영씨의 편을 들어주는 친정엄마로 빙의한 것인데. 나는 저 위의 장면 그 어디에서도 나의 편을 들어줄 친정식구 따위는 없으니까. 그러면 나는 빙의조차도 하지 못하는 그런 인생인건가. 

이제 다시 유심히 보니 책의 표지가 너무 서글프다. 김지영씨의 몸에서 빠져나간 혼 같은 저 검은 그림자는 그래도 아직 김지영씨를 떠나지는 못하고 있구나. 슬프다. 김지영과 나를 비교하며 누구 인생이 더 낫고 더 못한지 따지는 건 그 누구의 인생에도 무의미한 일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김지영씨는... 김동진씨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