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청년주간 발제문 일부
* 이 글은 '청년-인종 만들기: 청년세대론은 어떻게 청년을 타자화하는가' 라는 제목으로 2019년 9월 부산청년주간 포럼에서 발표된 내용의 일부입니다.
청년-인종
race를 한국어로 인종(人種)으로 번역하는 것은 적합하면서도 약간은 기이하다. 사람(人)의 씨(種), 즉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바꿀 수 없다고 상상되는 대상은 혈통/피부색(race) 외에도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테면 자신의 태어난 성별(sex)을 개인의 고유한 특징을 상당 부분 결정짓는 ‘타고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출신 계급(class) 역시 누군가의 현재를 좌우하는 사람의 씨 목록에 들어 있다. 여성과 남성, 노동자 집안 출신과 부잣집 출신은 근원적으로 다르고 이 차이는 결코 극복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하다. 이러한 계열의 인간 분류법을 확장하다 보면 혈액형이나 별자리, 사주까지도 이야기할 수 있을 테다. 구체적으로는 약간의 차이들이 있겠지만, 이렇게 다양한 인종론, 즉 인간을 범주(category)로 분류(classify)하는 실천은 대부분의 논의가 여러 측면에서 호환성을 갖는다. 대체로 인종론은 개인들을 깔끔하게 집단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이러한 차이는 자연적이고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의나 변동의 여지가 없는 진리에 가깝다고 본다. 나아가 이러한 분류의 결과로 산출된 범주들 사이에서 우열이나 위계를 가릴 수 있다는 상상으로 곧잘 나아가며, 범주 간에 발생하는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논리로 작용하기도 한다.
청년세대론에 관해 연구를 진행해 오면서 줄곧, 청년/세대 또한 하나의 인종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혐의를 가져 왔다. 세대주의(generationalism)적인 세대론은 세대, 즉 태어난 연도(출생코호트로서의 세대) 혹은 생애주기(연령코호트로서의 세대)에 따라 사람들을 깔끔하게 종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대주의는 “사회적, 정치적인 문제들을 세대의 개념으로 풀어 이야기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나는 정치학자 조너선 화이트(Jonathan White, 1978~)가 제시한 규정을 따르고 있으나, 역사학자 로버트 볼(Robert Wohl, 1936~)이 <1914년 세대>(1979)라는 저작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대주의 담론의 예시는 수없이 많이 들 수 있는데, 최근에는 조국 장관 사태와 관련해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많은 어론과 전문가들이 마치 이 사태, 구체적으로는 조국 장관 딸의 입시 비리 의혹에 특히 20대와 대학생들이 분노하고 있고, 이는 젊은 세대가 ‘공정성’에 민감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논의를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조국 장관 임명 반대 비율을 연령대별로 비교해 보면, 특별히 20-30대가 60-70대에 비해 더 많은 반대를 하고 있지도 않고, 심지어 이번 국면으로 인해 가장 많이 국정수행 지지율이 떨어진 연령대는 가장 현 정부 지지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40대라는 분석도 나오는 상황이다.
세대주의라는 개념은 아직까지 한국인들의 어휘 목록에 들어와 있는 개념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종주의(racism)나 성차별주의(sexism)에 대해서는 인식하고 그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꽤 자주 ‘청년은 어떠어떠하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왜 문제인지를 공감하지 못하고, 따라서 그런 표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대사회학이라는 분야가 조직경영학 등에 의해 전유되는 과정에서 세대주의적인 세대론은 세대사회학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비판적(critical) 성격으로부터 탈각된 채로 ‘보편 과학’의 외피를 입고 대중화되는 과정을 밟고 있다. 이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징후가 <90년생이 온다>(2018)의 베스트셀러 등극이다. <90년생이 온다>는 변화하는 시대와 변화한 청년세대에 맞게 따라가자는 식, 그러니까 겉으로는 ‘청년세대’를 긍정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90년생이라는 ‘요즘 것들’을 다른 인종으로 범주화하고 분류해내는 세대주의적인 상상을 강화시킨다는 점을 동시에 짚어내야 한다. 현재라는 유리한 위치에서 과거 사람들의 몰교양과 현재의 교양을 비교하는 우리들, 게다가 우리 혈통이 직접적으로 인종 문제의 가해자였다는 정설로서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은 우리들은 인종주의(racism)의 무식함과 폭력성을 비웃지만, 사실 인종주의 역시도 당시 가장 최전선의 과학지식으로부터 옹호된 상상이었으며 그런 바탕이 있었기에 실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세대별 차이나 세대라는 분류 범주는 ‘당연’한 데다가 심지어 이제는 인구사회학적 변수가 포함된 통계적 인간과학에 의해서 뒷받침되는 단계에 이르렀지만 그렇게 자연스러워보이는 것일수록 우리는 그 너머를 바라보고 질문을 던지는 일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차별과 혐오의 의미
연령주의(ageism)는 특정한 연령에 대한 부정적 편견과 고정관념이 존재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연령주의에 관한 연구를 검색하면 거의 대부분 노년/노인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확인하고 그 해소책을 찾는 연구가 대부분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실제로 부정적 관념이 투사되는 연령대가 기존에는 주로 노년층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 청년/젊은층에 대한 부정적 편견 또한 상당한 정도로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회통계 연구에서도 확인되는 바다.
연령주의적인 편견이 문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편견, 즉 인식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특정 연령층의 자유를 제약하는 원리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노년층의 경우에는 그들 세대가 근로의욕이나 근로능력이 없을 것이라는, 사회 변화에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는 종류의 선입관이 존재하며, 연령주의에 대한 연구들은 이것이 노년층의 실제 취업기회 박탈과 소득 감소 등의 문제로 이어진다는 점을 밝혀 왔다. 나는 현재 청년에 대한 세대주의적 담론이 가장 문제가 되는 지점은 바로 청년-인종은 아직 미성숙하고 능력이 덜 영글었다고, 그런 이유로 중요한 일을 맡기거나 그들의 의견을 수용하는 것은 부적당하다고 믿는 연령주의가 작동하도록 만든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청년을 동등한 시민의 지위로부터 (형식적으로는 그렇지 않을지라도) 실질적으로 배제시키는 결과를 가져 온다.
청년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들 한다. 여기에는 ‘과학적’이라고 포장된 근거가 따라붙는다. 청년들의 투표율은 가장 기본적으로 쓰이는 논리이고, 청년들이 뉴스를 많이 읽지 않는다는 얘기도 덧붙는다. 하지만 이 근거는 최소한 세 가지 측면에서 비논리적이다. 하나는 근본적으로 정치에 대한 관심을 투표율이나 신문열독율과 같은 지표가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적극적인 기권이나 기성 주류 매체에 대한 거부 등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이 같은 지표는 주로 청년세대에게 이미 불리한 지표들이다. 청년층이 중장년층에 비해 낮은 투표율을 보이는 것은 세계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인데, 보통 이를 청년들이 투표에 참여할만한 유인이 되는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 적극적으로는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논의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보면 청년이라는 생애주기가 이미 투표율이 낮을 것임이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 이 기준을 가지고 정치에 대한 관심을 논하는 것에는 어폐가 있다. 신문 열독률도 마찬가지인데, 젊은 세대가 뉴스를 접하는 채널이 완전히 다를 수 있고 그러한 뉴미디어를 통한 정치에 대한 관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점은 논의에서 쉽게 배제된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이 셋째로, 투표율이나 신문열독률이 정치에 대한 관심을 보여줄 수 있는 지표라는 점을 인정한들 그럼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투표를 하지 않은 사람’이나 ‘신문을 읽지 않는 사람’이어야 할 텐데 보통 세대주의를 지지하는 근거들은 투표를 하고 매일 정치뉴스를 읽는 청년들까지 같은 범주 안에 집어넣어 정치에 관심 없는 애들로 몰아버린다. 이러한 세대주의는 막상 청년들이 정치적인 의견을 내놓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민이 되려고 했을 때 청년들을 억압하는 기제가 된다. 청년들은 관심도 없고 어차피 뭘 모를 것이라는 편견이 작동하는 순간 청년은 청년-인종화되고 시민으로부터 배제되고 타자화되는 것이다.
흔히들 차별이라는 개념을 상상할 때 마치 ‘왕따’에서와 같이 적극적으로 누군가에게 해를 가하는 발언이나 행동을 하여야 차별이 성립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discrimination이라는 의미의 차별은 근본적으로 differentiation에서부터 시작된다. 너와 내가 평등한 존재라는 전제를 파괴하고 다른 인종으로 성립시키는 힘에서부터 차별이 발생한다는 뜻이다. 통계 자료를 들이대면서 최대한 논리적인 척하려는 수많은 담론이 청년-인종 만들기를 수행하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청년-인종이라는 전제 자체가 허구라는 점에서부터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다른 세대에 비해서 공정성을 유난히 중요시하는 청년-인종도, 정치에 관심이 없는 청년-인종도, 또한 반대로 기성세대에 비해서 창의성이 뛰어나고 능력이 출중한 청년-인종도 없다. 만약 특정한 세대에 가시적인 어떤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것의 원인은 많은 세대주의적 담론이 말하듯 인종으로서의 청년에서 찾아져야 할 일이 아니다. 자기충족적인 세대주의를 넘어, 특정한 생애주기와 역사적 국면이 교차하는 그 상황에 대한 꼼꼼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할 따름이다.
차별로서의 청년-인종화가 발생하는 순간 어렵지 않게 혐오도 따라붙는다. 혐오(hatred)라는 개념 역시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정의하고 합의하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게 되겠지만, 차별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혐오 행동을 해야만 혐오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정한 집단 범주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 자체의 존재를 혐오의 존재로 해석할 수 있다. 청년은 다른 시민과 다르다고 전제하는 것, 그 다르다는 전제 위에서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것, ‘청년’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팔이’해야만 청년을 공론장으로 불러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든 것 모두가 일정한 혐오의 존재를 입증한다. ‘청년이 미래’라거나 ‘청년이 투표를 많이 해야 나라가 산다’는 식의 ‘청년’을 긍정하는 수사들 또한 마찬가지다. ‘개념녀’라는 호칭의 존재, 아름다운 여성들에 대한 유별난 찬양이 오히려 여성혐오(misogyny)의 징후를 보여주는 것처럼, ‘투표장에 나간 20대’에 대한 특별한 찬양 혹은 그런 식의 선거 담론은 ‘20대 개새끼론’과 같은 청년에 대한 혐오가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