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류학이론 Essay 1
청년/청소년 담론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연구를 했던 초보적인 연구자로서, 나는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게 타자성의 문제, 특히 타자를 생산함으로써 권력을 행사하는 담론의 기술에 대하여 이론적인 관심을 두게 되었다. 사실 거칠게 말하면 일상은 수많은 타자들과 대면하고 관계하고 소통하는 일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는데, 예컨대 중산층의 자녀인 20대 남성 대학원생인 나는 매일매일 (교수님들이나 나이 많은 대학원 동료들을 비롯한) 기성세대를 만나고 여성들을 만나고, 나와는 계급/계층적인 위치가 다를 것이라고 예상되는 사람들(예컨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을 마주한다. 정체성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도 나는 나와 다른 생각들을 가진 타자들과 매순간 상대하고 있으며, 인류학과 수업을 수강하는 비전공생인 나는 그 수업 안에서 스스로 자신의 발언을 자신 스스로 설정한 ‘인류학의 기준’이라는 틀에 맞춰 계속해서 검열해보는 타자로서 존재하고, 한편으로 나 자신이 인류학 전공 대학원생을 타자로 만들기도 한다. 이와 같이 내게 타자성이란 매우 일상적으로 존재하고, 관계적으로 형성되는 문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학부 때 인류학 수업 하나를 수강한 이후로 – 그 수업의 커리큘럼은 사회학에서 다루는 텍스트들과 별다른 차별성이 없었다. 맑스, 베버, 뒤르켐, 부르디외 등을 읽었다. - 오랜만에 인류학 수업을 수강한 내게 처음 읽은 두 텍스트의 연구대상들은 평소 내가 읽었던 문헌들에 등장하는 그것들보다는 훨씬 더 ‘너무나도 거리가 먼 타자’들인 것처럼 느껴졌다. 트로브리안드섬의 원주민들(도부 족),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부족(주니 족), 아메리카 북서 해안의 원주민들(콰키우틀 족)은 나에게는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지리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거리가 정말, 정말 먼 타자였다. 물론 오늘날의 인류학이 초기 인류학과는 연구대상 면에서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하지만, 오늘날 거의 모든 사회과학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에 대한 연구인 반면, 인류학은 “타자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라고 정의된다(Davies, 2002/2005, 11-13쪽)는 사실이 계속해서 상기되었다. 두 책을 읽는 동안 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은 ‘타자를 어떻게 타자화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가?’의 이슈였다. 거리가 먼 타자들을 다루고 있는 두 저작에서는 타자화의 문제가 상대적으로 더 명백한 형태로 드러나 있어서,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타자라고 인식되지 않거나 혹은 타자화의 문제에 대해 덜 예민해질 수 있는 타자들(앞서 Davies는 ‘자신’이라고 표현한 타자들)을 연구할 때 유의해야 할 부분을 역설적으로 더 잘 찾아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전략적으로 동일시하기
19세기의 단선적인 문화적 진화론(unilineal cultural evolutionism)은 인류학 분과에 뿌리를 둔 첫 번째 이론적 관점(Lavenda & Schultz, 2007, p. 211)이며, 19세기 후반까지 진화론적 인류학자들은 생물학적 결정론자들(biological determinists)과 완전히 구분되지 않았다(ibids., p. 213). 말리노브스키와 베네딕트는 모두 여기에 비해서는 한 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프란츠 보아스(Frantz Boas)는 진화론적 관점, 그리고 20세기 초반 독일 인류학자들이 주도한 전파(diffusion) 이론이라는 두 종류의 환원주의(reductionism)를 모두 기각하고, 경험적인 민족지적, 역사적 증거를 활용하여 특정한 인간 사회 안에서의 변화의 특징적인 역사에 초점을 맞추는 역사적 특수주의(historical particularism)로 나아갔다(ibids., p. 214). 이러한 경향의 연장선상에 있는 말리노브스키 역시 야만인들(savage peoples)을 비이성적이고, 욕망에 충동적인 노예로 묘사하는 것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트로브리안드의 삶이 얼마나 잘 조직되어 있는지를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무지한 외부인들에게는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관습들이 실제로는 트로브리안드 사람들의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basic human needs)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ibids, p. 215). 20세기 초반 루스 베네딕트의 작업에 영감을 받은 미국의 문화인류학자들은 문화가 인간의 행동을 형성한다는 이론적 관점을 발전시켰는데, 왜 다른 문화권에 있는 성인들이 다른 가치관을 갖고 다른 실천을 하게 되는지를 개인적 인간 행위의 배치(configuration)에 대한 심리학 이론에 의지하여 이것을 전체 문화의 배치에 적용시켜보려고 시도했다(ibids, p. 217). 베네딕트의 <문화의 패턴>도 결국, 세 부족과 미국의 근대 사회까지 네 가지의 사회를 비교하면서, 인간의 문화적 행동이 결국 각기 다른 문화의 패턴에 의해서 다르게 조형된다는 것을 논의하고 이를 통해 미국사회에서 일탈적인 것으로 낙인찍히는 행위들이 다른 사회에서 얼마나 정상적인 것인지를 보여줌으로써 관용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이다.
말리노브스키와 베네딕트의 접근은 원시사회가 그들이 살고 있는 영국/미국의 근대 사회와 완전히 다른 사회라는 일반적인 관념을 기각하는 측면이 일부 있다. 예컨대, 말리노브스키는 트로브리안드 사회의 주술을 이상하고 기이한 것으로 이야기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해당 사회를 통합시키는 의례적인 기제이자 트로브리안드 사람들이 세계를 통합적으로 읽어낼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세계관으로 위치 짓는다. 현대사회의 과학에 해당하는 기능을 트로브리안드에서는 주술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베네딕트 역시 상대의 배신을 언제나 염두에 두는 적대성이나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복수극 등 이상하게 보일 수 있는 행동들에 대해서 그 사회 내부에서 그 행동들이 갖는 나름의 합리성을 강조하는 설명을 제공한다. 특히 편집증과 같은 현대 정신의학 용어들이 등장함에 따라서, 원시사회와 야만인들에게 따라붙는 타자성이 어느 정도 소각된다. 타자를 타자로서 바라보려고 할 때보다, 그렇지 않은 것으로 바라보려고 할 때 오히려 타자를 실제로 이해할 수 있을 가능성은 높아진다.
다만 두 사람에게서 아쉬웠던 부분이 바로 그들이 연구대상을 이국적인 것으로, 타자로 보는 관점에서 충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인상이었다. 말리노브스키는 기본적으로 그가 기능주의(functionalism) 인류학을 정초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베네딕트도 여러 사회를 한꺼번에 제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 사회 내의 문화의 패턴을 설명하는 방식은 기능주의적인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두 사람이 마치 그들이 그리고 있는 부족들의 문화가 매우 통합적인 것처럼 매끈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과 관련되는데, 글을 읽다보면 부족 사회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아주 단순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회와 문화의 요소들이 어떠한 통합적 특성(혹은 문화적 패턴)에 맞추어서 유기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따로 검증해볼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이러한 서술이 다소 부족사회를 과잉하게 단순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원시사회는 근대사회에 비해서 훨씬 더 단순하게 보존되어 있는 사회라고 보고 있는 시선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생겼다. 특히 두 저작에서 특별히 드러나고 있지 않는 부분은 부족사회 내에 존재하는 정치 구조나 권력의 작동 문제, 사회 내의 분열과 갈등, 부족사회 외부의 근대(제국주의 서구)와의 교류 등이었는데, 이러한 문제들을 생략하고 나면 부족사회는 너무나도 단순해서 설명하기 쉬운 사회가 되어버리고, 또 저자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결국 근대 서구 사회와는 다르게 단순한 사회라는 면에서 부족사회의 위치는 타자의 위치로 회귀되어 버리고 마는 부분이 있다.
인류학이 아마도 큰 틀에서 질적 연구의 일종이라고 한다면, 질적 연구는 사실 연구에 있어서 그 자신이 하나의 도구이기도 한 연구자가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출발하느냐에 따라, 또 얼마나 그 스스로의 관점이 바뀔 수 있다는 열린 자세를 가지고 임하느냐에 따라서 엄청나게 다른 연구결과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타자를 타자로 보려고 하면 타자로 보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보려 하지 않으려고 했을 때 그나마 타자를 가능한 한 타자화하지 않는 연구 서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개인적으로 처음 했던 것은 오늘날의 ‘청년세대’ 담론에서 젊은층이 어떠한 식으로 타자화되는지를 살펴보면서였다. 청년층의 미디어/테크놀로지 이용이나 가치관은 실제 경험적으로 측정해보면 다른 세대와 다르지 않은 부분들을 상당히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많은 담론들은 청년층의 미디어/테크놀로지 이용에 있어서 일탈적인 측면들을 강조하면서 청년들을 타자화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동후(2009)는 테크놀로지와 청년세대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경향을 기술적 이국주의(technological exoticism)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이국주의가 연구대상을 타자화하는 효과를 지닌다고 한다면, 그러한 이국주의와 인식론적으로 단절하고 타자인 연구대상의 반대에 서 있는 ‘우리/자신’과 타자를 전략적으로 동일시하는 식의 연구대상에 대한 연구과정을 거치는 것이 타자화를 피하기 위한 하나의 연구전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자료 해석 과정에서의 트라이앵귤레이션
연구대상을 ‘우리/자신’과 전략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연구대상을 타자화하지 않기 위한 인식론적 전략이라면, 방법론적으로는 어떤 전략을 취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말리노브스키는 이와 관련해 잠정적인 한 가지 대답을 제공한다. 바로 그가 경험적 증거를 정확하게 수집하기 위해 살아 있는 사회에 집중하는 연구를 주장했으며, 현대적인 참여관찰 현장 방법론의 선구자로서 민족지적 자료의 수집에 있어서 일종의 규준을 확립했기 때문이다(Lavenda & Schultz, 2007, p. 215). 반면 베네딕트의 경우 주니 족과 콰키우틀 족에 대해서는 현지조사를 수행했지만, 반면 도부 족의 경우에는 현지조사를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료를 받아서 서술에 활용했다. 베네딕트는 현지조사를 거의 하지 않았고, 조사에 흥미를 보이지도 않았으며, 체계적인 이론화 작업을 거치지도 않았으며(Geertz, 1988/2014, 137쪽), 문화적 차이를 서술함에 있어서 불편한 왜곡이 나타나기도 한다(ibids, 151쪽). 글쓰기 전략에서도 차이가 있다. 말리노브스키의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은 번역된 텍스트가 700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긴 분량의 문화기술지이고, 이것을 읽는 과정이 어느 정도 지루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탄탄하게 서술되어 있고 이 서술이 실제로 트로브리안드 섬의 쿨라 교역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훨씬 더 많이 드는 텍스트였다. 베네딕트의 <문화의 패턴>에 드러난 세 부족의 이야기는 어떤 부분에서는 매우 말초적인 흥미를 주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패턴화되어 있는 부족들의 모습을 흥미롭게 짧은 분량으로 그려내고 있다. 클리포드 기어츠(ibids., 135쪽)는 베네딕트의 이러한 서술을 서구 사회에 일종의 경종을 울리기 위한 의식적인 전략이라고 주장한다. “너무나 익숙한 것과 굉장히 이국적인 것의 자리를 뒤바꾸는 병치 전략”으로서, “문화적으로 가까운 것은 괴상하고 인위적인 것으로, 문화적으로 거리가 있는 것은 논리적이고 솔직한 것”으로 묘사해버리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말리노브스키의 저작이 베네딕트의 것보다 조금 더 ‘학문적(과학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차이는 결국 현지조사를 얼마나 꼼꼼하게 했느냐 자체에서 오는 것일까? 이것은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지만, 여기에는 또 어느 정도의 함정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지조사의 시작은 인류학의 역사적 시기와 본격적인 근대 인류학을 나누는 경계선(Davies, 2002/2005, 42쪽)으로 평가받고, 인류학이 가질 수 있는 방법론적 강점이나 인류학을 인류학으로 분별시켜주는 핵심적인 특징이 현지조사 혹은 참여관찰 그 자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다만 현지조사를 직접 했기 때문에, 경험연구를 직접 수행하였기 때문에 그 연구의 정당성이 상승하는 것은, 혹은 타자를 타자화하지 않는 연구가 수행되었다고 보증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현지조사 자체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인데, 연구의 정당성이나 신뢰성을 방법론 그 자체로 환원해버리는 ‘쉬운 경향’에 대해서 반대해야 할 필요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양적 연구뿐만 아니라 질적 연구에서도 예컨대 ‘현지조사 기간 몇 년’, 혹은 ‘심층 인터뷰 몇 명’과 같은 연구의 분량을 제시하는 것 이외에는 연구방법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이나 자료해석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논문에 잘 서술하는 것이 덜 강조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상황에서 질이 아닌 양을 기준으로 정당화되는 방법론과 타자를 타자화하는 식의 인식론이 결합할 경우에는 완전히 연구대상을 교묘하게 타자화하는 연구문헌이 생산될 수 있을 것이다.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직접 인터뷰를 통해서 청년들을 타자화하는 논문이 탄생하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았다.) 특히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질적 자료의 경우 대부분 논문의 저자가 아닌 사람이 다시 그것의 타당성 여부를 검증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연구자들을 위한 공공재인 일부 통계 자료와는 다르게) 연구자가 직접 수집한 질적 자료는 공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연구참여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까닭도 있다.)
직접 참여관찰을 하는 것도 좋지만, 직접 현지조사를 했느냐 아니냐는 어떻게 보면 두 번째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예컨대, <도시빈민의 삶과 공간>에서 공동연구자는 직접 현지조사/참여관찰을 하지 않고 당시 빈민들이 거주하는 판자촌이었던 사당동에 대학원생 둘을 보내서 거주시킨다(조은, 조옥라, 1992). 신체적 혹은 성격적인 문제로 인해 참여관찰을 직접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연구자가 있을 수도 있다. 젊은이들의 하위문화연구에 관심이 있는 50대 남성 연구자는 연구지에 진입하기조차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참여관찰로 수집된 하나의 자료를 다른 시각을 가진 여러 연구자가 교차 검증을 해 볼 수 있다는 것에서도 자료를 직접 수집하지 않고 공유하여 새롭게 논문을 쓰는 것의 의의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여러 연구자들의 교차 검증, 즉 트라이앵귤레이션은 다양한 방식으로 방법론적으로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현지조사 자료에 기존의 다른 문헌들을 교차시키는 방식도 있고, 연구참여자들에게 직접 그러한 서술의 타당도에 대해서 검증해보도록 하고 그 내용을 각주에든 부록에든 담아서 독자들에게 공개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Benedict, R. (1934). Patterns of Culture. 이종인 옮김 (2008). <문화의 패턴>. 고양: 연암서가.
Davies, M. W. (2002). Introducing: Anthropology. 정해영 옮김 (2005). <인류학>. 서울: 김영사.
Geertz, C. (1988). Works and Lives: The Anthropologist as Author. 김병화 옮김 (2014). <저자로서의 인류학자>. 파주: 문학동네.
Lavenda, R. H. & Shultz, E. A. (2007). Core Concepts in Cultural Anthropology. McGraw-Hill.
Malinowski, B. (1922). Argonauts of the Western Pacific. 최협 옮김 (2013). <서태평양의 항해자들>. 광주: 전남대학교출판부.
이동후 (2009). 사이버 대중으로서의 청년 세대에 대한 고찰: 사회적 소통과 관여를 중심으로. <한국방송학보>, 통권 제23-2호, 409-448.
조은, 조옥라 (1992). <도시빈민의 삶과 공간>. 서울대학교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