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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테크놀로지와 윤리적 문제

Technology and Everyday Life 7주차 리딩로그

by 페르마타

터클과 혹실드의 글은 뉴-테크놀로지와 관계되어 그동안 읽었던 (많지 않은) 글들 중에서 단연 인상적이었다. 이 글들은 많은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실제로 사람들이 새로운 기술과 그러한 기술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기술-문화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지를 현학적이지 않게 담고 있다. 이렇게 성실한 경험 연구는 단순하고도 허무한 기술 낙관론이나 기술 비관론으로 빠져버릴 위험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온다. 인간이 해소하지 못했던 욕망들이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통해서 실현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들이 끌려 나오고, 테크놀로지로 인해서 인간 사회가 ‘인간답지 못해지고 있다’는 식의 비관론과는 다르게 테크놀로지를 경유해서 개인 간의 관계(relationship)나 사회, 에티켓 등을 다시 생각해보는 사람들로 만들어져가고 있는 조금 다른 유형의 인간 사회가 재발견된다. 테크놀로지는 사회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특정한 욕망들과 결부되어 사회를 재구축한다.


터클의 글에서 특히 만족스러웠던 부분은 주로 청소년이나 젊은 성인들을 연구대상으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테크놀로지 이용에서 드러나는 특이성을 강조하면서 청소년들을 일탈적 행동을 하는 존재로 그려내는 기술적 이국주의(exoticism)와는 완전히 거리를 둔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국내의 저널리즘 담론에서 수업시간에 필기도 하지 않고 칠판을 사진으로 찍어 가고, 헤어지는 것도 카톡 하나로 헤어지고, 랜덤 채팅을 통해서 하룻밤의 사랑을 꿈꾸는 존재들로 젊은층을 타자화하고 있는 상황과 비교되는 것이었다. 전화 통화를 부담스러워하는, 나 자신이 가진 성향은 사실 이것이 하나의 세대적인 특성은 아닐까 하면서 고민해보는 지점이었다. 주변의 어른들을 보면 전화 통화로 많은 정보를 교환하고, 업무를 잘 처리하고, 감정을 교류하는데 비해서 나는 왜 전화가 오면 일단 전화를 건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고, 이것을 받을지 말지 고민하는 시간을 거쳐야만 하는지에 대해 의문이 있었다. 또 내 주변의 많은 또래들은 (심지어 기자로서 취재 업무를 하는 와중에도) 전화를 통해서 업무를 처리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진짜 어른이 된다는 것을 상징하는 지표가 ‘전화통화를 잘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이러한 고민에 대해서 터클의 글은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변천사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욕구의 역사와 연결하여 보여주고, 또 전화 통화량이 줄어드는 현상이 반드시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전세대에 걸쳐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라는 것을 이야기해주면서 내가 그간 했던 전화사용의 세대차에 대한 의문을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터클은 명시적으로 그 개념들을 사용하여 분석하고 있지는 않지만, 코호트 효과(cohort effect)와 연령 효과(age effect), 시기 효과(period effect)를 잘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불안이라는 감정과 전화의 사용을 엮어서 설명한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테크놀로지의 판매를 위해서 불안이 상업주의적으로 조장되기도 할 것이고, 또 9.11 테러와 같은 역사적인 경험이 그러한 불안의 대책으로서 테크놀로지를 찾는 경향을 만들기도 했을 것이고, 연결되지 않은 상태와 불안감은 사실 어떤 학생들에게는 핸드폰을 압수당하지 않기 위한 변명거리로 작용하기도 할 것이다. 많은 상황들이 겹치는 와중에 연결성이 물리적으로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친밀감을 실제로 느끼고 있는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커다란 변화를 설명하는 부분은 사실상 아주 새로운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입체적이라고 느껴졌다. 책 제목을 보고 편견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던 것을 후회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여담이지만 Alone Together라는 원저의 제목을 ‘외로워지는 사람들: 테크놀로지가 인간관계를 조정한다’ 로 바꿔 지은 것은 오역을 넘어서 왜곡이라는 생각이 든다.


혹실드의 글을 읽으면서는 더 생각이 복잡해서 이 기술들을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상황이 됐다. 혹실드가 들고 있는 사례들은 단순히 테크놀로지를 통해서 새롭게 사회성이 재구축되고 있기 때문에 사회성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괜찮다는 식으로 끝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혹실드가 들고 있는 두 사례에는 권력과 계급, 전지구화와 같은 조금 더 복잡한 문제들이 개입한다. 러브 코치의 경우에는 그러한 러브 코치나 온라인 데이팅 사이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례들이 러브 코치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온라인 데이팅에서 벗어난다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러브 코치에게 분노한다는 사실, 러브 코치조차도 일종의 진정성을 강조한다는 사실 등이 러브 코치의 등장을 마치 인간사회의 타락쯤으로만 여기는 담론에 반대하고 러브 코치의 존재를 옹호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러브 코치와 데이트의 온라인화, 모바일화가 수반하는 데이트/연애/섹스의 중간계급화라는 문제, 혹은 책에 그 부분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원나잇스탠드를 위한 러브 코치들이 픽업 아티스트들을 양성하면서 (주로) 여성을 단순한 성상품으로 취급하는 식으로 일종의 여성혐오 문화를 생산하고 있다는 문제들을 함께 생각하면 러브 코치가 연애의 영역을 새롭게 시장화하고 있는 상황을 그냥 두고 보고만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함께 든다.


구글 베이비 문제의 경우에는 사실 더욱 더 윤리적으로 참기가 힘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전지구적인 권력 관계에서 강자들(중에서는 약자인 경우 – 성소수자 등 - 가 많은)이 약자를 착취하는 상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결국 인도의 여성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얻지 않았냐고 하는 일종의 반론이 있을 수 있겠으나, 혹실드가 설명하고 있듯이 일반적인 시장의 작동 원리는 결국 시장에서의 초과 이윤이 사라질 때까지 공급 측에서의 출혈 경쟁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형태로 진행되며, 노동자가 피라미드의 가장 아랫단에서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읽으면서 작년 말 보았던 <인 허 플레이스>라는 영화도 생각났다. 대리모 이야기는 아니지만 임신한 시골 마을의 10대 소녀가 아이를 낳은 후에 아이를 불임 부부에게 넘겨주기로 하고, 불임 부부의 아내와 소녀, 소녀의 어머니가 한 집에서 살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는데, 남자친구와의 접촉과 외출을 완전히 차단당하고 아이를 낳아 다른 여자에게 넘겨줄 날만을 기다려야 하는 소녀는 자신을 파괴하는 방법으로 그러한 권력관계에서의 속박에 저항한다.)



*참고문헌

Sherry Turkle (2010). Alone Together. 이은주 옮김 (2012). <외로워지는 사람들: 테크놀로지가 인간관계를 조정한다>. 서울: 청림출판. pp. 109-146, 195-234.

Arlie Russell Hochschild (2012). The Outsourced Self: Intimate Life in Market Times. 류현 옮김 (2013). <나를 빌려드립니다>. 서울: 이매진. pp. 35-72, 119-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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