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chnology and Everyday Life 6주차 리딩로그
Wajcman(2010)은 테크놀로지(기술)에 대한 페미니즘 이론들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가장 최근의 조류이자, 필자 자신의 입장이기도 한 테크노페미니즘을 현재적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테크노페미니즘은 젠더 이슈에 있어서의 기술결정론을 거부하면서 - “기술은 그 자체로 가부장적이지도, 그 자체로 해방적이지도 않다.” - 기술과 젠더가 상호를 구성한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기술의 배치가 지금 일어난 것과 같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지점(“things could be otherwise”)을 파고든다. 필자가 소개하고 있는 기술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논의 중에서는 여성과 기술의 만남에서 진보적인(radical) 가능성을 찾고 있는 조류가 가장 공감할 수 없었다. 정체성을 숨길 수 있기 때문에 가능성의 공간으로 여겨졌던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실제적으로 얼마나 기존의 젠더 질서를 ‘혐오’의 정서까지 덧붙여 공고화하는 실천들이 발생하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술 비관론적인 접근을 펼쳤던 페미니스트들이 문제 삼았던 당연시되는 남성-기술-전문직이 결합된 의미체계, 여성과 관련된 기술의 중요성 저평가, 기술 관련 노동시장에서의 남성적 문화와 여성 배제, 테크놀로지에 의한 여성의 신체 착취 등의 이슈가 여전히 계속되는 상황이라고 여겨진다.
삶의 양식을 상당한 크기로 바꾸어 놓는 새로운 기술이 만들어지고 확산됨에도 불구하고 젠더 질서는 뒤집어지지도, 권력 관계가 폐지되지도 않는 것일까? Tacchi(2000)의 글은 젠더 질서가 새로운 기술을 경유하여 재생산되는 과정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똑같은 매체인 라디오를 이용하는 패턴에서 ‘평균적인’ 남성과 ‘평균적인’ 여성 사이에 차이가 발생하고, 이러한 차이는 특수한 방식으로 감지되고 해석된다. 남성의 이용 패턴은 합리적이고 유용성을 갖는 행동으로 해석되는 반면, 여성의 이용은 판타지적이고 ‘쓸데없는’ 행동으로 여겨진다. 혹은 최소한 실제적이면서 상상적인 두 집단 사이에는 주로 듣는 장르나 채널 면에서 차이가 나타나고, 그 차이는 ‘자연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집단 범주에 대한 지식은 라디오 콘텐츠의 생산자들이 정체성의 표지들(젠더, 연령, 직업,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 등)로 구성된 ‘타겟 수용자’를 상정할 수 있도록 만들며, 수용자들도 집단 범주에 의한 특수한 소비자 정체성에 조응하는 행동을 보이며 그러한 지식들의 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취한다. 논문에 제시된 연구참여자들이 그러한데, 젠더 권력 관계에서 일반적으로 약자로 논의되는 여성들도 라디오 이용과 관련된 여성성 담론을 자신들의 것으로 내면화하는 경우가 많고, 남편들에 대해서 해석할 때도 라디오 이용과 관련된 남성성 담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자기 정체성, 그리고 타인의 정체성에 대한 상상을 집단 범주의 정체성에 끊임없이 일치시켜 가는 담론의 수용 과정 – 여기에는 소위 ‘정체성의 정치’도 포함된다. - 에서 지배적인 권력질서는 지속적으로 재생산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여성적인 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또는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흐트러뜨릴 수 있느냐의 문제, 즉 담론 정치의 문제가 중요한 페미니즘의 이슈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과거에 비해 여성들의 참여가 더 많아진 한 스포츠를 해당 스포츠가 신자유주의 자기계발적 맥락에 접합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는 학위논문 심사장에서 한 심사위원이 이런 문제제기를 했다고 하는데, 학술담론 생산자들이 돌아보아야 할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왜 여자가 하면 다 문제래.”)
Tacchi는 두 부부의 사례를 비교하면서, 한 부부의 관계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던 까닭으로 서로의 취향에 대한 존중이 있었는지, 또 남성이 여성에게 자신의 취향을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혹은 맞춰나가고 있는 부분이 있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이 부분에서 영국의 정치학자 웬디 브라운이 ‘관용’이라는 태도에 대해서 강자들의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해주는 언어로 다시 해석했던 것을 떠올리게 되었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 자체는 확실한 것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여성의 특수성을 남성이 이해해주느냐 그렇지 않고 억압하느냐, 즉 강자인 남성의 태도가 관계의 유지를 위해서 중요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은 라디오를 판타지로서 경험하고 남성은 그렇지 않다고 보는 기존의 해석에서 나아가, 여성과 남성 모두 라디오를 판타지로 경험하는 측면이 있으나 여성은 그것을 인정하고 남성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식의 성차를 바라보는 새로운 담론으로 나아가는 점은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담론은 기존의 담론에 비해서 훨씬 더 ‘구성주의적’이다. 기본적으로 미디어 이용의 판타지적인 측면을 살펴보는 것은, 여성의 이용이나 남성의 이용에 집중하지 않고 기술이 인간에게 체험되는 방식 일반을 논의하고 있으며 정체성 형성에 관한 더 광범위한 이론적 논의에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집단 범주들에 따라서 고정되고 일반화된 본질주의적인 정체성을 주체들이 이미 지니고 있다는 관점에서 벗어나서, 그러한 정체성들을 각자의 실천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획득해나가려고 한다는 점이 드러나 있다고 보았다. 더불어 본질주의적인 젠더 이분법을 해체하고 난 후 다시 젠더 이분법을 구축하는 과정은 성차에 대한 본질주의적인 오해를 다시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가 있기는 하지만, 젠더와 같은 집단 범주라는 설명 변수가 가질 수 있는 유용성 자체를 폐기하지 않고 연구자가 구성주의적으로 이를 활용해서 담론 구성체에 개입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참고문헌
Judy Wajcman (2010). Feminist theories of technology. Cambridge Journal of Economics, 34, 143-152.
Jo Tacchi (2000). Gender, fantasy and radio consumption: an ethnograpic case study. in Mitchell, C. (ed.) Women and radio: Airing difference. (pp. 152-166). Roudtledge.
Wendy Brown (2006). Regulating Aversion: Tolerance in the Age of Identity and Empire. 이승철 옮김 (2010). <관용: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 서울: 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