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체화 과정 안에서
석사 첫 학기 때 문화연구 전공 대학원생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고, 선생님은 정체성이라는 말을 정체화과정identificatory process이라는 개념으로 바꾸어 생각하고 그렇게 적자고 제안하셨다. 그때는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고 말았지만, 구체적으로 그 개념의 차이를 제대로 생각할 수 있게 된 건 본질주의와 구성주의 구분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건가 아닌건가) 되고 나서였다(아마도 올해 초). 정체성이 본질적으로 생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체화 과정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라고 할 때, 비로소 정체성을 구성주의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때 정체성은 그렇기 때문에 이미 사회의 담론장에 존재하는 정체화의 준거 대상을 바탕으로 거기에 주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일치시키는 정체화 과정에서 구성, 형성되고 어떤 순간에는 안정된 정체성을 형성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나는 성정체성과 관련해서도 퀴어 운동에서 태어날 때부터 원래 퀴어였다고 이야기하는 전략을 취하는 것이 조금 마뜩치 않은 지점이 있다. 동성애라는 담론이 있기에 동성애자로 정체화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은 무성애, 양성애, 부치, 변태성욕자 등등의 경우, 그리고 이성애자(남성 혹은 여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고 획득되는 것이지만, 누군가가 태어날 때부터 퀴어가 아니었더라도 퀴어가 되는 것이 어떻냐 그렇게 정체화하는 것이 어떻냐 뭐(!)왜(!)뭐(!) 하는 방향이 더 급진적인 자유 획득의 정치학일 것이다. (사실 이 부분 논의는 지금 당장 이렇게 생각하기는 하지만 자신은 없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요즘 생각하는 것은 정체화할 준거틀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이따금씩 혹은 계속해서 아주 자주 내가 나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면서 그런 나 자신을 부정하고 괴물로 만들어버리곤 했다. 물론 이런 퀴어함은 모든 사람에게 조금씩 존재하는 것일텐데, 아마 그리고 이런 퀴어함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원래는 없던 담론이나 정체성 같은 것들이 새롭게 생성되는, 인간의 행위성이 발휘되는 그런 상황들이 만들어지는 것일 테다.
여기까지는 8월에 썼던 글인데, 오늘 선생님과 같이 쓰는 소논문을 논의하기 위해 선생님 뵙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내가 '청년'이라는 단어, 개념에 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의식들이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많이 바뀌어가고 있음을, 또 '연구자'나, '학자'나, 혹은 '운동/활동가', '시민'과 같은 다양한 (고정되어 있지는 않은) 정체성들로의 정체화 과정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 더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어쩐지 박사과정 들어온지 만 1년 10개월만에 처음으로 박사학위논문에 대한 아이디어도 혼자 생각해보게 되었다. 항상 떠오르는 주제마다 이건 너무 작은 이야기라서 저널논문 하나 내기나 하면 다행이라는 생각만 했었는데, 다소 거창하고 추상적이지만 이런 생각이 드디어 들어봤다는 것에서 큰 위안을 느꼈다. 나의 삶이 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 나의 정체화 과정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갈지 나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어쩐지 오늘 같은 날이 주는 감정은 언제나 짜릿하고, 내가 이 길 위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회의들을 잠시나마 날려버릴 수 있게 해 준다. 이미 뿌듯한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