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 분과 연합 송년 세미나 토론문
문화연구 분과 연합 송년 세미나(2016년 12월 27일, 연세대)에서 지정토론을 맡게 되었습니다. 대학원생 한 명을 패널로 부르시겠다는 주최 측의 기획으로 인해 소중한 기회를 얻었는데 뭔가 더 제대로 할 걸 하는 아쉬움이.. 많이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전략 실패 호호.. 암튼 썼던 토론문 글을 올려봅니다.
안녕하세요. 토론을 맡게 된 연세대 박사과정 김선기입니다. 이번에 조금 더 다양한 패널을 구성하는 취지로 박사과정에게도 토론을 맡기시는 거라고 하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토론을 하겠다고 했는데, 오늘이 가까워오면 가까워질수록 왜 하겠다고 했는지 스스로 후회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는데요. 아무래도 이 거대한 현상을 두고 아주 거시적인 역사의 흐름에 대한 진단과 예측을 하거나 하는 식으로 혹은 이론가의 이름을 이야기하면서 저 혼자 한 생각을 블라블라 말씀드리는 것보다는, 그건 제 깜냥에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고, 이번 일과 크고 작게 연결되어 있을 저의 일상에서 제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면서 어떤 이야기들을 했었고 또 그게 저한테 어떤 생각들을 하게 했는지를 좀 구체적으로 산만하게 말씀드리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겠다 생각했습니다. 다소 모두 알고 계시는 원론적인 얘기 같을 수도 있고 혹은 너무 블로그 글이나 일기 같아서 제가 읽으면서 오그라들어버릴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저는 사실 이번 촛불집회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못했습니다. 지금도 사실 다 끝나지 않았는데, 17일, 24일에는 제가 아직 코스웍 중이어서 학기말 보고서를 생산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고 그것 말고도 연말까지 내야 하는 보고서들이 어찌나 많은지요. 죄책감과 부채감을 느끼면서 여기 극장 바로 옆이 제가 쓰는 연구실인데 거기 앉아있었고요. 그 전에는 매주 토요일마다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청년을 연구하는 젊은 연구자들이 발표하고 같이 청년연구의 나아갈 길을 논의하는 콜로키움인데요. 11월 12일부터 매주 열렸습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한참 전에 잡아놓은 일정이라 변경하기가 힘들어서, 매주 8시, 9시에 끝나고 나서 늦은 촛불을 들러 광화문에 가던 기억이 나는데요. 광화문에서 두 번, 부산 서면에서 한 번 정도 참석을 했었습니다. 또 행사를 하긴 했는데, 청년연구자 콜로키움이 이번 사건 때문에 많이 망했습니다. 일단 청년 연구자 분들과 미리 사전신청하셨던 분들이 광화문에 가시느라고 다들 콜로키움을 찾지 않으셨고요. 그리고 자꾸 청년연구라는 주제와 관계없이 혹은 얕은 연결고리 하에서 촛불 정국 이야기를 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들이 주로 나왔냐면요. 주로 대학원생들이나 활동가들이 많이 모였기 때문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이번 촛불로 인해 갖게 된 희망보다는 그 희망 너머에 존재하는 걱정거리들을 더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그 걱정거리에 관해서는 잠시 뒤에 다시 더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언론이 지금의 촛불과 시민 참여를 굉장히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그렇게만 보이도록 그려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2015년 민중총궐기 때만 해도 무보도로 일관하거나 폭력시위 프레임을 들이대던 언론이었는데, <조선>마저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런 걸 우리가 배웠던 헤게모니라고 이야기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실제로 이번에 박근혜를 시민의 힘으로 탄핵시킴으로써 얻게 된 희망이라는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2009년 겨울 용산 참사를, 그 해 여름 미디어법이 통과되는 걸 TV를 통해 지켜보았던 우리들, 2012년 12월 19일 10명쯤 되는 친구들과 술집에 5시 반에 모였다가 출구조사 결과를 보고 힘이 빠져 6시 반에 헤어졌던 우리들, 2014년 겨울에 통합진보당이 헌재를 통해 해산되는 장면을 봤던 우리들, 그리고 2016년 11월 트럼프가 당선되고 나서 울다가 잠들었다던 제 친구. 이런 우리들은 뭐 제가 아직 젊어서 제가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청년세대라고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청년세대만 느꼈던 게 아니죠. 어쨌거나 이런 우리들은 지난 국회의원선거 결과를 통해서, 또 어쨌든 이렇게 함께 모여서 촛불을 들고 이것이 탄핵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그동안 점점 더 짙어져왔던 패배감이나 해도 안 될 거라는 무력감, 그리고 대의정치 시스템에 대한 불신 같은 것에서 많이 자유로워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 언론이 아직은 그려내지 않고 있는 생각들과 갈등들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청년연구자 콜로키움에 참석했던 한 활동가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그는 광장에 주말마다 나가지만 거기 그렇게 많이 모여 있는 인파를 보고 있노라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 있는 게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어떨 때는 화도 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모두 한 마음 한 뜻인 것처럼 촛불을 들고 정의를 외치고 있던 저 많은 사람들은, 사실 지금까지 그가 연대를 요청한 수많은 일들을 외면하거나 심지어는 적극적으로 비난하기도 했을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촛불을 보면서 힘이 나는 게 아니라 풀이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누군가는 평화시위라는 프레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이 부분은 오히려 페이스북과 같은 SNS에서 저보다 더 말을 잘하시는 많은 ‘페북 논객’들이 지적하시고 있는 부분이지만, 잠깐만 다시 언급하려고 합니다. 이번 시위에 한정해서 평화시위라는 프레임은 전략적으로 시위대에 의해서 잘 활용된 것이라는데 저는 생각을 같이 합니다. 평화시위라는 전략을 잘 써먹은 덕분에 언론도, 경찰도 마치 시위대의 편이 된 듯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고, 232만이라는 숫자가 광장에 모일 수 있었습니다. 시위 장소는 위험하니까 너는 가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2008년 촛불집회 때부터 줄기차게 시위 장면이 방송될 때면 그걸 보고 항상 전화를 주시던 저희 부모님도, 이번 겨울에는 주말에 서울에 올라오셔서 저와 함께 광화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평화시위가 좋고, 폭력시위는 안 된다’라는 단순한 프레임이 이후에 벌어질 다른 많은 시위들에게 족쇄가 될 수 있고, 시위대마저 국가에 의해 ‘길들여지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걱정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번 촛불, 광장, 시민참여라는 것이 너무나도 예외적인 상황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친박근혜 대 반박근혜로 너무나도 명확하게 갈라지는 전선이 있었던 것이고, 박근혜가 너무나도 명확하게 잘못을 범했습니다. 4%를 제외한 90% 이상의 여론이 반박근혜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박근혜를 뽑았던 사람들마저도 광화문에 나와서 박근혜 하야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지난 총선에서 정의당 비례대표 후보로 나왔던 조성주 씨가 경향신문에 쓴 칼럼이 생각이 나는데요. 그는 칼럼에서 4%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면서 사실 4%의 소수 여론은 사실 항상 자신이 서게 되는 위치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아마도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이야기하는 이들은 언제나 소수였고, 또 앞으로도 소수의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현재의 이 예외적인 상황이 얼마나 갈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박근혜-최순실 정국이 지나가고 나면 상황은 거의 원래대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 정국에서도 이미 차기 대선 주자 지지도 조사에서, 중앙SUNDAY 조사인데요, 다자 구도에서 반기문이 문재인을 제치고 1위라는 조사결과가 나옵니다. 새누리당과 비박정당의 가상 지지율은 합치면 여전히 30%에 가까운 수치가 나오고, 정의당의 지지율은 이 정국에서 오히려 떨어졌다는 결과도 나오고 있습니다. 어제 학부 후배들과 만나 저녁을 먹었는데요. 같이 모인 5명 모두가 지지정당이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갤럽 여론조사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지지정당이 있는 사람들이 많은지가 신기하고 의아하게 느껴질 정도로, 제가 그동안 만나온 친구들은 열에 여덟, 아홉은 지지정당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혹은 녹색당, 노동당 등의 당원이거나.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는 싫고, 새누리당은 싫지만 그 이후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각자의 희망이나 대안을, 또 그것들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정치 세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뜻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저는 이 상황이 정말, 정말 예외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이러한 예외 이후를 준비하는 계기로 잠깐의 예외 상황을 활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스스로를 문화연구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 민망한 일입니다만, 제가 조금 더 문화연구자가 되기 위해서 혹은 좋은 문화연구자가 되기 위해서 지금부터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해 보고 있습니다. 아직 고민이 깊지는 못하지만, 특히 눈앞의 페이퍼 보고서들을 훅훅 쳐 내느라고... 짧게라도 최근 제가 했던 생각들을 말씀드리면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크게 이야기하자면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문화연구를 공부하고 실천하는 사람으로서 권력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아직 연구를 많이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저는 문화연구 트레이닝 과정에 들어온지 이제 4년 정도가 되어가고 있는데, ‘청년세대’ 담론, 대학원생 문제, 크라우드 펀딩, 카카오톡, TV드라마 등 이런저런 소재들을 조금씩 다루어 보았는데요. 돌아보면 권력의 문제에 대해서 제가 다루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적극적으로 하지는 않았던 것 같고, 연구를 한 후에 그것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다만 신자유주의, 기업가적 자아, 연령주의, 세대주의 같은 내 주제와 친화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개념들을 꿰어서 글을 써 왔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최근 많이 들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권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오긴 했던 것이죠. 그런데, 이런 일을 조금 아직은 덜 성찰한 상태에서 하다 보니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권력을 이야기하면서 오히려 권력이 아주 강하고 극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언급하고 거기서 끝나는 형태로 글을 써 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존재를 재차 확인하거나, 보수 세력의 헤게모니, 재벌이나 국가의 강력한 힘을 확인하고 거기에서 끝나버리는 글을 쓰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 이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무슨 대안이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다루지 못했으며, 왠지 앞으로도 다루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조금 고통을 받아왔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러한 권력의 존재를 새롭게 확인하고 사실로서 인식하는 것, 거기까지만 해도 훌륭한 연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이미 모든 사람들이 그 존재를 알고 있는 권력의 형태나 특수한 행사 양식과 관련해서는, 이제 더 이상은 우리의 연구의 결론이 그것을 재확인하는 것이 될 필요는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앞으로 저는 제가 하고 있는 또 해야 될 연구들에서 초점 자체를 권력의 존재를 확인하고 권력을 비판하는 문제에서 기본적으로 유동적인 성격을 가진 권력의 어떤 부분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지를 발견하고 또 어떤 행위자들이 권력관계를 흔들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는 데 제 힘을 훨씬 더 많이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고 있습니다. 예컨대, 아까 말씀드렸던 ‘나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던 사람들이 박근혜 하야를 외치는 상황’에 좌절하거나 허탈함을 느끼는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이러이러한 가능성이나 잠재력이 있을 것임을, 이러이러한 일들이 진행되고 있고 물론 어떠한 어려움이 있겠지만 미래는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니까 이런 이런 게 가능할 수도 있다고 얘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아주 개인적으로는 ‘청년세대’ 담론을 연구하면서 ‘청년’이라는 말을 가지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기본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제가 최근에는 청년운동을 연구하면서 또 청년연구들을 전체적으로 다시 연구하면서 또 청년연구자들과 만나면서 ‘청년’이라는 말을 가지고 무얼 해야 세상이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는 변화를 겪고 있는 중인데요.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한 조건이 있다면 저는 이러한 ‘대안 찾기’를 아주 쉬운 방식으로 하지는 않아야겠다는 생각도 조금은 가지고 있습니다. 문화연구의 ‘문화’ 혹은 그냥 이 세계가 너무나 복잡하고 무언가 하나의 중심 원리로 환원시키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안 대안이나 권력의 균열에 대한 탐색은 ‘한겨레, 경향신문, 민주당, 정의당’과 같은 이름으로 생각할 수 있는 상상보다는 ‘세월호 세대, 촛불 세대’와 같은 경험 혹은 트라우마, 다시 말해 자극 – 반응의 단순한 인과관계를 통해 할 수 있는 상상보다는 조금 더 복잡하고 어려운 상상이어야 할 것이리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WAGL이라고 하는 정치 벤처에서 시민들의 직접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 시민대표를 정하자는 온라인 운동을 해서 논란이 된 바 있는데, 물론 아무런 대안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테크놀로지를 통해 직접민주주의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보다도 복잡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초반에 이번 촛불집회에는 많이 나가보지 못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어쨌든 저도 2002년의 효순이.미선이 집회를 TV로 보았고 월드컵 광장을 체험했고, 2008년 대학생이 된 후부터 사실 거의 매년 광장에 나가 본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런 광장의 역사는 제게 해답이 그렇게 가까운 곳에 간단한 형태로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제 귀에 특별히 걸리지 않거나 오히려 평소에 잘 쓰지 않는 표현이라 그 단어가 귀에 들리는 게 어색하게 느꼈던 표현인데요. 요즘 활동가 친구들과 만나면 가끔 이 단어가 왠지 참 좋다고 계속 이야기하게 됩니다. ‘자임하다’ 라는 표현인데요. 랑시에르가 말했던 ‘불가능한 동일시’ 라는 표현도 생각이 나면서, 아무튼 누가 나에게 그런 권한이나 역할을 준 것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뭔가 아까 말씀드린 그런 역할들을 내가 자임해보겠다, 그리고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그런 마음들이 많아지고 모였으면 좋겠다, 하는 나중에 생각해보면 이런 말을 한 게 너무 부끄럽다고 후회하게 될 것 같은 그런 말로 제 이야기는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기회를 주시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