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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마타 Feb 17. 2019

이해는 오해, 오해는 이해

박상영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 연작 리뷰

* 이 글은 책 리뷰 매거진 <오글리O'Glee> 1호에 실렸습니다.



지하철에서 잠깐 집중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을 수 있는, 단편소설을 즐기는 편이다. 천천히 내용을 곱씹을 만한 여유를 좀처럼 만들지 못하는 내게는 이 정도 템포가 제격, 한 편을 다 읽은 후 다음에 뭘 읽을지 잠시 몇 페이지를 뒤적거리다가 책을 가방에 넣고 도시인의 파워워킹을 시작하면 어쩐지 시간을 허비하지 않은 것 같고 만족스러운 느낌이 든다. 이 적당한 루틴은 종종 무너지는 경우도 있다. 그날 선택한 소설이 영 재미가 없거나 조금 길고 지루해서 읽었어야 했을 글자들을 잔뜩 남겨놓은 채 책을 덮어야 하는 그런, 반갑지 않은 일도 있지만, 또 반대로 기분 좋은 돌발상황을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6호선 대흥역부터 불광역까지 열두 정거장을 가는 동안 들고 있던 박상영의 첫 단편집을 에스컬레이터가 나를 운반하고, 또 내 다리가 계단을 오르는 동안 놓지 못했던 그날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정체성


표제작인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를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이미 읽었었고, 단편집도 주로 순서대로 읽는 습관상 첫 번째 작품인 <중국산 모조 비아그라와 제제, 어디에도 고이지 못하는 소변에 대한 짧은 농담>을 먼저 읽은 터였다. 그 즈음에 읽었던 <여름, 스피드>의 작가인 김봉곤과 함께 박상영 역시 ‘게이 소설가’라는 범주로 알려져 있었고 이미 읽은 작품들도 게이들의 세계를 다루고 있었다. 1 그래서인지 내게 완전히 낯선 다른 생활세계가 담겨 있는 글을 읽어 나가면서, 어쩐지 ‘타자의 세계’를 훔쳐보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자꾸 그 세계를 ‘게이 문화’나 ‘게이들의 삶’과 같은 인식 범주 안에 욱여넣고 있다는 의식이 들었다. 제제의 성판매나 제제에게서 위안을 얻는 성구매자들의 서사, 법적/제도적인 결혼이라는 사랑의 종착점이 없는 문화에서 발생하는 욕망들의 매우 불안정한 충돌들을 목격하면서, 그것을 ‘게이 서사’라는 틀 안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나 스스로에 대해 윤리적으로 계속해서 불편해졌다.


“오늘 아침 개를 잃어버렸을 때 소라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인스타그램에 개를 찾는 내용의 글을 올린 것이었다. 그 글은 포스팅한지 두 시간 만에 좋아요 삼만 개를 받았고 만팔천 번 공유되었다.”(57쪽)


박상영 작가의 데뷔작이기도 한, 순서상 두 번째 단편인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는 그런 윤리적 갈등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이야기인 줄 알았다. 이성애 관계에 있는 연인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용한 소설의 첫 문장은 우리들이 상대적으로 마음의 가책 없이 쉽게 비정상적인 것으로 판정하곤 하는 SNS중독자들의 군상을 그리는 작품일 것임을 암시한다. 두 인물(김과 박소라)이 키우던 개(혹은 반려견)를 2  잃어버린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동극이라고 할 수 있을 이 이야기는 현대사회의 인스타-자아에 대한 풍자를 중심으로 매우 스피디하고 자극적으로 달린다. 소설의 화자는 남성인 김이다. 김의 시선으로 굴절되어 재현되는 소라의 모습은 위선적이고, 분열적이고, 허영으로 가득하다. 동물과 동물권에 대한 관심을 인스타그램에 전시하고 실종된 패리스 힐튼을 찾아야 한다고 김에게 소리를 지르지만, 정작 직접 개를 기르게 된 것도, 또 개를 찾기 위해 필요한 모든 노동을 수행한 것도 소라가 아니라 김이었다. 소라의 인스타그램 바이오는 스스로를 모델이자 영화감독, 에세이스트이자 소설가, 여행작가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사실은 일정한 벌이가 없는 반(半)백수에 가깝다. 김이 스스로 고백하는 자기 자신도 특별히 앞뒤가 일관된 사람은 아니다. 그의 인스타그램 활용법은 음지에서 섹스를 거래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처음에 예상하지 못했던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여성혐오적으로 구성된 특수한 ‘일부 여성’의 스테레오타입 - 위선, 허영, 노동을 하지 않음, SNS에 자기 자신을 전시함 - 을 그대로 체현한 ‘여성’ 캐릭터의 등장, 성구매를 자연스럽게 하는 ‘남성’ 캐릭터의 시선에 녹아 있는 여성을 물화시키는 인식, 나아가 액티비스트를 포함해 ‘일자리 같은 일자리’ 혹은 ‘정형화된 노동’을 하고 있지 않다고 여겨지는 인간들에 대한 냉소나 혐오적인 시선,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창조한 ‘남성 성소수자’ 작가의 존재. 이러한 삼각구도가 그려지고 나니, 나는 또 다시 나 자신과 작가의 윤리를 주제로 갈등해야 하는 상황으로 빠져 들어갔다. 나는 왜 소라라는 인물을 인식하기 위한 매개로 이미 수많은 창작물과 온라인커뮤니티의 게시글을 통해서 재생산되어 온, 구성된 ‘일부 여성’의 이미지를 연상할 수밖에 없는가? 왜 남성인 작가는 하필 남성 인물의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그러한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내는가? 그리고 왜 하필이면 또 그 작가는 그렇지 않아도 ‘쓰까페미’와 ‘터프페미’의 전선에서 문제적인 인간류로 떠오르게 된 ‘성소수자 남성’인가? 나는 결국 약간은 말초적인 감각들을 건드리는 이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었으면서, 또 뭐라고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인가?



세대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를 다 읽고 바로 책을 덮지 못했던 것은, 바로 그 뒷순서에 실려 있는 <부산국제영화제> 때문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에 대한 일종의 스핀오프다. 즉, 같은 이야기의 연장이었다. 1인칭 관찰자 시점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변한다. 김의 관점에서 해석되었던 소라의 행동과, 반려견 패리스 힐튼의 의미가 소라의 목소리로 다시 입혀진다. 나 같은 독자들은 소라가 고정적인 노동을 할 수 없었던 이유를 대강 추측해 볼 수 있게 되고, 또 소라가 김이 SNS를 통해 다른 여성들과의 섹스를 즐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된다. 김이 전혀 모르고 있는 소라의 세계도 등장한다. 소라는 한참 연하인 군인 태혁을 때때로 만나, 김과의 관계에서 얻을 수 없는 ‘만족스러운 섹스’를 즐긴다. 김은 소라가 한가롭게 요가원에나 다니는 걸로 알고 있지만, 소라는 그때마다 요양 병원에 있는 말기 암환자 어머니를 수발하러 가는 것이다. 3년 가까이나 관계를 유지해 온 커플이지만, 이 관계에는 수많은 구멍들이 나 있다. 김은 소라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소라는 김에게 이해받으려 하지 않는다. 서로는 서로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편모 가정에서 자라나 암에 걸린 엄마의 수발까지 드는 불쌍한 여자가 될 바엔 차라리 부모 돈을 흥청망청 쓰며 생각 없이 사는 여자로 여겨지는 편이 나았다.” (88쪽)


“우리는 그 많은 추잡한 일들을 공유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가장 내밀한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하긴 상대방에게 진실을 숨긴 채 다른 것들을 욕망하며 사는 우리의 관계야말로 지극히 일반적이고도 정상적인 커플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123쪽)


이로써 ‘남성 성소수자’ 작가와 허영스러운 여성 캐릭터, 성구매자 남성 캐릭터의 삼각구도 내에서 맴돌던 나의 감상과 내적 갈등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허영스럽다는 표현 바깥에서 이해하기 힘든 한 여성의 기이함에 대해 남성의 시선에서 서술했다는 혐의를 받을 수 있었던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는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서 비로소 이해와 오해, 그리고 소통 (불)가능성에 대한 연작으로 완성된다. 오해라는 테마는 보통 비슷한 구성의 연작 소설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으며, 단편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내가, 한 편을 즐겁게 읽은 후 다음 글이 연작이라는 걸 알았을 때 기쁨과 기대를 갖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에도 이기호 작가의 <나를 혐오하게 될 박창수에게>와 <오래전 김숙희는> 연작 3, 일본의 미스터리 작가 미나토 가나에의 <포이즌 도터>와 <홀리 마더> 연작 을 흥미롭게 읽었다. 같은 사건에 대한 이해와 의미부여가 얼마나 다르게 일어나는지를 제3자의 관점에서 지켜볼 때 생겨나는 즐거움이 분명히 있다.


다른 연작 소설이나 오해와 소통의 문제를 묻는 서사들과 비교해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와 <부산국제영화제>가 갖는 특이점이 있다면, 작품 속에서 여러 장치들을 통해서 발현되고 있는 동시대적 감각일 것이다. 2018년 현재 젊은층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어플리케이션인 인스타그램과 해시태그가 ‘짜치지 않는’ 방식으로 잘 활용되어 있고, 동물구호단체, 타투, 부산국제영화제, 맥도날드 등과 같은 내게 매우 익숙한 소재들이 크고 작게 배경에 담겨 있다. 주인공인 소라와 김에서부터 짧게 지나가는 인물들까지도, 아마도 수도권에 거주하고 인문사회과학 언저리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라면 익숙히 알고 있을, 그런 인간 유형을 닮았다. 이해와 오해가 일어나는 방식, 인물들이 소통을 하는 방식 역시 지극히 보편적이면서도 동시대적, 즉 시대-특수적이다. 가장 친밀한 관계에 있으면서도 상대의 진실에 대해서 묻지 않는 것, 물리적인 신체의 현존이 오히려 껍데기에 불과하고 진짜는 인스타그램 속에 있다고 믿는 태도는 어쩌면 이전에는 보기 쉽지 않았던 새로운 종류의 인간형을 구현하며, 그러한 동시대성이 이 연작을 무언가 새로운, 혹은 새로운 시대나 새로운 세대의 감각이 녹아 있는 소설로 이해되도록 한다.



윤리, 도덕


책에 실린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윤재민은 두 단편에 대해 “서로에 대한 진심을 숨긴 채 피상적인 교제를 유지하는 남녀에 대한 인상적인 연작”(339쪽)이라고 평했다. 또 박상영 소설들의 인물들을 “도덕과 윤리를 결여한 채 타인 지향의 평평한 자의식에 갇힌 군상들”(331쪽)로 설명한다. 윤재민은 ‘세대’라는 말을 사용하는 쉬운 길을 가지는 않지만, ‘피상적’, ‘타인 지향’, ‘도덕과 윤리를 결여’, ‘평평한 자의식’과 같은 언어들은 주로 새로운 세대의 젊은이들의 가치관, 혹은 시대 전반의 대중적/보편적인 도덕성을 재단하기 위해서 사용되어 온 역사적 맥락이 있는 언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언어들은 특정한 방식의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자원임과 동시에, 대부분의 개념이 그렇듯 다른 측면의 이해가능성을 불가능하게 하는 오해의 자원이기도 하다.


소설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모두 알 수 있겠지만, 박상영 소설의 인물들은 실제로 존재할 법하지만 동시에 다소 극단화된 캐릭터 설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평범한 인간들의 관계 맺기를 하지 못하는 비정상의 영역으로 해석하는 몰아넣기를 하고 나면 우리는 이러한 인물들이 상징하는 세태에 대한 한탄이나 자조 너머로 나아가는 일에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가장 친밀한 관계라고들 여겨지는 연인에게 자신의 치부나 ‘진실’을 드러내지 않는 것, 자존감의 원천을 실제의 관계가 아닌 인스타그램에 스스로 창조한 자아에서 찾는 것을 도덕과 윤리의 결여가 아니라 형성되고 있는 새로운 종류의 도덕과 윤리로서 독해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것은 ‘타인 지향’형의 수동적이고 비주체적인 인간상의 발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자아를 창조하고 탐구하는, 따라서 현실적인 삶의 제약을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극복하고 봉합해내는 주체의 형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소라와 김, 그리고 태혁의 관계는 도덕과 윤리, 행동의 구성조건으로 되돌아가 따져봄으로써 특정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볼 수 있는 듯도 하다. 내가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를 처음 읽을 때 아주 빠르게 게이, 여성, 남성, 액티비스트,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 등 이미 구조화된 범주들을 이용해 캐릭터들을 오해해버렸던 것과 같이 우리가 사는 2018년의 한국은 자신과 타인을 독해하는 데 있어서, 인간을 분류하는 다종다양한 범주들, 그리고 거기에 해당하는 편견 혹은 고정관념이 매우 강하게 작동하는 사회다. 이러한 범주들은 갈수록 셀 수 없이 더 다양해지고 있고, 이를 구조화하는 기술적인 맥락은 사람들이 실제로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을 때조차 다른 세계를 살도록 하는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진화에 있다. TV와 지상파 방송, 주요 일간지들은 더 이상 국가 단위로 작동하는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y)를 보증하는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다른 콘텐츠를 소비하고, 다른 지식을 생산하고, 다른 세계를 꿈꾸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각기 서로를 다른 ‘인종’으로 보는 수많은 정체성 관념들을 구축해낸다.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이해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그러한 관념들에 의해 침식당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아직까지는 기술이 그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한 탓에 여전히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을 점유한다. 더불어 이성애 관계의 결혼을 통해 만들어지는 가정이 ‘정상 가족’으로, 이성애 연인 관계가 정상적인 성인의 삶으로 여겨지는 구조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제약 조건 속에서 소라나 김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욕망의 실현을 위해 서로에게 ‘부담이 될 만한’ 기대나 요구를 하지 않고, 오히려 인스타그램과 같은 언뜻 무한한 자아 실현이 가능한 공간을 통해 ‘자기를 배려’하는 것, 그리고 어차피 온전히 이해받기 쉽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부담이 될 만한’ 정보를 상대에게 공유하지 않고 그저 마치 어느 정도의 의무만 서로 유지한다면 이 계약이 해지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 위에서 하는 행동들. 이는 정말이지 도덕과 윤리의 결여가 아니라 그것이 특수한 방식으로 ‘과잉하게’ 발현되는 양상인 것으로 보인다. 솔직하지 않은 것은 때로는 윤리적 태도일 수 있다. 마치 가부장적 억압에 침묵으로 견뎌온 여성들의 삶이 ‘윤리적 태도’로 여겨져 왔던 것처럼, 또 역설적으로 한 사회가 지탱되기 위한 조건으로 기능해 왔던 것처럼, 자신의 욕망을 실제로 드러내는 것은 뒤에서, 혹은 인스타그램과 같은 창조된 공간을 경유하고, 실제 관계에서는 적당히 사회 규범에 맞는 자아를 연기하는 일은 이 시대, 그리고 젊은 세대가 가진 윤리이자 도덕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소라와 김을 이해할 수 있는 조금 더 나은 방법은, 그들의 관계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것이야말로 ‘피상적인’ 현대사회의 관계에 대한 지식 안으로 밀어 넣어 읽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도덕과 윤리가 특수하게 형성되도록 만드는 구성 조건과 권력관계를 꼼꼼하게 심문하는 일을 통해 가능해지는 것은 아닐까. 



mis/understanding


이해, 오해와 같은 키워드들과 연관된 서사를, 그리고 그와 연관해서 박상영의 연작을 좋아했던 것은 이 키워드가 연구자로서, 또 그런 직업인이기 이전에 하나의 존재로서 나를 휘감고 있는 중요한 단어인 탓이다. 


“모든 이해는 오해입니다. 그러나 모든 오해는 이해입니다.”


내 메일의 하단 서명란에 적어놓은 문구다. 인식(recognition)을 곧 오인이라고 보았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이론에서 착안하여 쓴 말장난이지만, 많은 문제들에 대한 내 입장을 실제로 담고 있는 문장이기도 하다. 내가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를 읽으면서 작가와 캐릭터들에서 판단하였을 때, 또 이 소설에 대한 메타담론을 생산하는 문학평론가가 세계를 바라볼 때, 일상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대할 때, 또 심지어 여기 두서없는 글에서조차 무언가를 이해했다고 주장함으로써만 성립하는 문장들에는 언제나 오해의 가능성이 흘러넘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자신의 모든 이해가 오해일 것이라는 의심, 나의 생각과 나 사이의 거리를 확보해 두는 윤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내 이해가 오해일 수밖에 없다는 ‘거의 유일한 진실’에도 불구하고 오해를 시작하는 것은 이해를 향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래도 오해를 계속 하는 수밖에 없겠다. 나의 이해와 세상의 이해를 의심하고 오해하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오해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열어젖히는 일. 이해불가능성이 전제되기 때문에 이해받기를 요구하지 않는 게 일종의 윤리로서 작동하고 있는 사회에서,5 혹은 그러한 윤리를 계속해서 강화시키는 지식 생산과 유통의 권력이 작용하는 사회에서, 이 권력구조를 뒤집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식을 고민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북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한다. 마치 인스타그램에 읽은 책을 올리고 좋아요를 받기 위해서 책을 읽는 사람처럼. 박상영의 소설을 다 읽고 찍어 올렸더니, 한 친구가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와 <부산국제영화제>에 나오는 소라는 아무래도 실제로는 게이로 읽어야 할 것 같다는 댓글을 달았다. 분명히 글 속에 여성이라고 명시가 여러 번 되어 있지만, 나도 어쩐지 소라를 게이로 보아야 이 소설이 더 핍진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또 다시 남성 성소수자, 여성 등에 대한 편견들이 뇌 속에서 작동하면서 어지러움이 생긴다.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오해할 것이다. 오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서.


(끝)



1 나는 이 글에서 ‘게이’라는 말을 성적 지향 범주가 아니라 특정 하위문화의 범주로 사용하고자 한다. 뉘앙스의 차이가 전달되기를 바라며.

2 소설 내에서 남성인 김은 ‘개’ 혹은 ‘애완견’으로, 여성인 박소라는 ‘패리스 힐튼’ 혹은 ‘반려견’으로 같은 존재를 호칭한다.

3 이기호 소설집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2018, 문학동네)에 실려 있다.

4 미나토 가나에 소설집 <포이즌 도터 홀리 마더>(2018, 영상출판미디어)에 실려 있다. 그러고 보니 미나토 가나에의 첫 장편 <고백>도 각 장마다 다른 인물의 시선을 보여주는 식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

5 TMI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이해받기를 원하지 않는 윤리를 열심히 체현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나를 스스로 불쌍히 여기지만 이해받으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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