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편 마케팅은 여성 혐오, 영화 본편은 여성 중심 서사
머리 아픈 영화를 연속으로 몇 개 본 직후라서 조금 가볍고 말랑말랑한 영화가 필요했다. 내가 이 영화를 봤다고 하면 이런 영화를 왜 돈 주고 보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원래 나는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므로 <그날의 분위기>는 어쨌든 내게는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이 영화로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비슷비슷한 킬링 타임 영화 한 편 보고 나왔구나, 묘하게 감정이 두근거리긴 하지만 또 그게 특별한 점은 없구나, 또 어떤 면에서는 좀 많이 지루했구나, 그냥 '멜로 영화'만 했어도 좋았을 걸 '로맨틱 코미디'로 포장하기 위해서 들어간 듯한 군더더기 코믹 씬들이 많이 거슬리는구나, KTX 홍보영화? 아니면 부산 KT 농구단 홍보영화였을까...? 요런 생각들 하면서, 새벽 2시 택시를 타고 집에 와서 이 영화가 별로였던 이유들을 헤아리다가 잠이 들었다.
네? <그날의 분위기>가 여성혐오 영화라뇨?
갑자기 <그날의 분위기>에 관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둘러보다가 이 영화가 '여혐(여성혐오) 영화'로 가열차게 까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이다. 영화를 관람한 한 사람으로서, '도대체 이 영화가 왜?'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것이다. 나는 지루하고 평범한 데다가 너무 뻔한 해피엔딩은 교훈적이기까지 해서 주인공들 매력 말고는 별 매력이 없는 이 영화에 단 하나의 미덕이 있다면 원나잇스탠드라는 선정적으로만 빠지기 쉬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여성을 객체화시키지 않고 줄거리를 끌어가는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해진 "저 오늘 웬만하면 그쪽이랑 자려고요."라는 재현(유연석)의 대사는 그 대사 하나만 놓고 보면 성희롱이 맞고, 또 영화 전체를 그렇게 보이게 할 소지가 충분히 있다. 일단 해당 대사만 놓고 보자면, 영화가 아닌 실제 현실에서, 그것도 KTX 옆좌석에 앉은 처음 본 이성에게 저런 말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상식적인 상황에서라면, 에필로그 속 김슬기가 보여준 것처럼 그런 말을 꺼낸 남성은 뺨을 맞거나 최소한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게다가 영화 속 재현이라는 캐릭터를 기준으로 두고 보더라도, 재현이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수 있는 인물인지도 잘 모르겠다. 재현은 저 말도 안 되는 성희롱적 대사 한 마디를 던진 후부터는, 수정(문채원)에게 그 어떤 성희롱적인 발언이나 행동도 하지 않으며 그녀를 완벽하게 배려한다. 심지어 섹스를 통해 얻는 쾌락을 목적으로 삼고 목적지향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 모든 순간에 수정을 향해 있는 그의 감정에 충실하게 행동할 뿐이다. 그래서 오히려 원나잇스탠드를 결심한 수정이 육체적인 관계를 빨리 끝냄으로써 일탈로 인한 죄책감이나 힘든 감정을 정리하고 싶어 조급한 행동을 보이는 반면, 재현이 오히려 '지금 자면 안 될 것 같다는' 감정을 느끼면서 육체적 관계가 지연되는 나름대로 '놀라운' 장면까지 영화 속에 등장하게 된다.
<그날의 분위기>는 남성성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원나잇스탠드 성공 후기'가 아니라, 여성성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멜로 영화'에 가깝다. (그것이 성공했는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원나잇스탠드라는 조금은 특별한 사건 속에서 변화하는 남녀의 세밀한 감정들을 담아내려고 노력한 흔적이 영화 곳곳에 드러난다. 왜 이 영화가 여성 혐오적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라 여성 중심 서사를 그려낸 영화인지에 대해서는 (내가 황진미 님보다 더 잘 쓸 자신이 없으므로) 영화평론가 황진미의 글 '우리가 비록 유연석, 문채원은 아닐지라도...'를 참조하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이 글에서는 앞서 '미친놈'이나 할 법한 저 대사에 대해서도 "모호한 감정을 내세우면서 지분거리는 게 아니라, 명쾌한 요구와 함께 분명한 동의를 구한다"는 면에서 "신선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 글에서 내가 참조하고 있는 영화평론가 황진미가 오히려 젠더 감수성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 하는 의심도 있을 수 있는데, 그는 이전에 여성혐오로 읽힐 만한 '부인 살해'가 줄거리인 영화였던 <탐정: 더 비기닝>은 물론이고, 여성혐오와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블랙코미디 <돌연변이>에도 '여성 혐오'의 프레임을 통해 비평했던 바 있다. <돌연변이>의 주진(박보영) 캐릭터에서 여성 혐오의 흔적을 발견한 평론은 매우 탁월하다고 생각하니 궁금하신 분들은 링크를 참조하시면 되겠다.)
상업영화 마케팅, 돈 벌려면 이게 최선이었을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그날의 분위기>에 관한 여성 혐오 논란이 일어난 것일까? 나는 아마도 이 영화를 여성 혐오 영화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영화를 관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올초 함께 개봉한 비슷한 장르의 영화 <나를 잊지 말아요>와 더불어 흥행에 실패했다. 50만 관객이나 무사히 넘기길 기원해야 할 판이다. 게다가 페이스북 페이지 '메갈리아4'에 올라온 이 영화를 비판한 최초 게시물이나, <한겨레>나 <노컷뉴스>에 실린 관련 기사를 보면 대부분의 비판은 포스터 문구나 예고편에 나온 대사나 자막에 대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애초에 이 논란은 이 영화에 대한 것이 아니라 포스터/예고편에 관한 내용이었을 테지만, 이것이 조금씩 확대되는 과정에서 영화 자체가 여혐 영화라는 식으로 전이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당연히 영화를 안 보고 포스터/예고편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메갈리아4'는 이 영화와 같은 게시물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처음 본 남자가 섹스하자고 조르는 것을 거부하는 여자에게 '철벽녀'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이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식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분위기>에서 재현(유연석)은 처음 본 여자에게 원나잇스탠드를 제안했을 뿐, 섹스를 조르지도, 어떻게든 억지로 동의를 받아내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하지도, 즉 '열 번 찍지도' 않는다. 수정(문채원)도 그냥 한 남자에 대한 일편단심으로 그 남자와의 결혼에만 목매고, 다른 사랑이나 관계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차단한 '유교적이거나 남성들의 시선에 맞춰진 여성상'도, '철벽녀'도 아니다. "웬만하면 그쪽이랑 자려고요"라는 원나잇스탠드에 대한 암시 이후에 그들의 감정과 관계가 각자의 주체성과 윤리성 속에서 변화하는 모습을 꽤나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는 면에서만 본다면 <그날의 분위기>는 꽤나 괜찮은 영화다. 그런데 이 꽤나 괜찮은 영화를 '맹공남 대 철벽녀'라는 정말 '19금 에로영화'에나 나올 법한 구도 속으로 굴려 떨어뜨린 것은 누구일까? 괜히 트집 잡고 싶은 페미니스트들일까? 땡!
정답은 아마도 99%, 이 영화의 마케팅 전략일 것이다. (물론 감독이 마케팅을 이렇게 하자는 쪽까지도 이야기를 했을 수 있고, 또 어쨌든 영화 전체는 감독의 책임이라는 점에서 감독의 책임도 없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하루에 한 여자', '철벽녀', '맹공남', '자유연애', '되느냐 마느냐'. 아마도 배급사, 투자사와 마케팅 부서에서 크게 관여했을 이 영화의 홍보용 줄거리나 포스터, 예고편에 등장하는 단어들의 목록이다.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콘셉트 화하는 과정에서 <그날의 분위기>에서 어쩌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감정에 대한 진지한 접근은 완전히 다 뒤로 물러나게 해 버리고, '하루에 한 여자' 식으로 '자유연애'를 하는 '맹공남'이 '철벽녀'에게 "웬만하면 그쪽으로 자려고요"라는 말로 건 수작이 '되느냐 마느냐', 혹은 두 주인공이 '자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영화를 단순화시켜 버린 것이다. 남성 내레이터가 "되느냐 마느냐"라고 계속해서 읊어대는 예고편은 이러한 단순화의 결정판이다. 어쩌면 이러한 단순화는 영화의 대중적인 흥행을 위해서 필수적인 코드화 작업이었을 수도 있을 테다. 그러나 이 단순화는 주체인 남성이 자신의 성적 쾌락을 위해 대상 여성에게 작업을 거는 게임이 마치 영화의 핵심인 것처럼 그려냄으로써 <그날의 분위기>를 '여성 혐오적 영화'로 인식될 가능성을 열어젖혀 버리는 의도하지 않은 효과도 동시에 만들어냈다.
이 유치한 마케팅은 영화 전체를 '여혐'으로 낙인찍히게 만든 주범이기도 하고, 관객의 온전한 영화 관람을 망쳐 놓은 방해꾼이기도 하다. 보통 내 경우에는 평론이나 영화에 대한 후기 글, 별점 등은 영화를 본 후에 보려고 하는 편인데, 사전에 얻은 정보가 영화에 대한 감상을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의 분위기>를 볼 때는 아마도 내 경우엔, 이 영화의 마케팅에 노출되었던 것이 내 감상을 제한하고 방해했던 것 같다. 처음 영화를 다 보았을 때는, 재현(유연석)과 수정(문채원)의 감정 변화가 너무나도 설득력 없다고 느꼈는데, 왜냐하면 '카사노바 맹공남'인 재현이 갑자기 '진정한 사랑'이나 '한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나가고자 하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나, '일편단심 철벽녀'인 수정이 갑자기 일순간 원나잇스탠드를 주체적으로 허락하고, 10년 된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하게 되는 것, 이 변화들이 너무 갑작스럽게만 느껴지고 최초의 캐릭터 설정에서 너무 엇나간 전개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점점 생각해 보니, 사실 '맹공남'과 '철벽녀'라는 기준 자체를 영화 홍보사에서 내게 심어준 것이지, 이 영화의 초반부에도 사실은 재현을 감정보다는 원나잇스탠드의 쾌락만 중요한 캐릭터라고, 수정을 10년 된 연인에의 정이나 집착만 중요하지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캐릭터라고 단정 지을만한, 그런 근거는 아무 곳에도 없었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결론은, <그날의 분위기>는 영화 마케팅 전략이 영화 관객의 영화에 대한 온전한 수용에, 나아가서는 영화 평론/비평에도 얼마나 큰 제한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보여준 안 좋은 사례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