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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마타 Aug 19. 2018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1)

지식연구 세미나 시즌1 1회차 RP

읽은 것:

Mannheim, K. (1929). Ideologie Und Utopie. 임석진 (역) (2012).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파주: 김영사. 1부, 5부

Burke, P. (2000). A social history of knowledge 1: From Gutenberg to Diderot. 박광식 (역) (2017). <지식의 사회사 1: 구텐베르크에서 디드로까지>. 서울: 민음사. 1장.     


드디어 만하임을 (약간이지만) 읽었다! 흥미로웠고 기쁜 마음이 됐지만, 어려운 다른 ‘고전’ 텍스트를 읽는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온전한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었고, 또 같은 테마가 이렇게 저렇게 반복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버크 1장도 잘 읽었다! 약간 <다시 보는 미디어와 젠더> 서장 읽는 것처럼 쉽고 명쾌하게 정리가 되는 기분이었는데, 더불어 몇 가지 포인트들이 구체적인 지식(문화)연구에 관한 잠재적인 느낌들을 생각해보도록 했다. 이하는 (만하임을 위주로 쓴) 아주 주관적인 정리와 감상, 가끔은 상상.     


1. 만하임은 지식사회학을 ‘지식의 존재 제약성’에 관한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지식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이론 외적 조건을 회피하지 않고 학문의 지평으로 끌어들이자는 입장과 사회적 상황이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고 그 인식의 방식(혹은 시각성) 자체가 이미 동일하지 않다는 전제는 이미 거의 완전히 수긍하고 있는 것이었다. (만하임의 글이지만 부르디외나 질적연구방법론을 통해 배운 의견들을 재차 확인하면서 읽는다는 느낌도 들었다.) 어쨌든 만하임은 ‘존재 제약성’에 관한 ‘무의식적 요소’의 영역을 연구의 표면으로 끌어올리자고 제안한다. 상이한 지식이 형성되는 배경에는 그러한 상이함이 나타나도록 하는 시각 양식의 차이와 같은 무의식적인 영역 정신권(圈)의 매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식사회학자는 겉으로 드러난 논점 그 자체에 직접 달라붙는 것이 아니라 시각 양식을 확인하여 이해하려고 한다. 이러한 표층과 심층의 구분이야말로 지식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스스로의 차별점과 정당성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논점 그 자체만 얘기하다보면 어느 편을 위한 지식을 학문적 정당화하는데 봉사하게 될 우려도 있고, 기본적으로는 기술적(descriptive)이게 될 위험이 크다. (그리고 아마도 표층에서 심층으로 논의의 수준을 한 차례 옮기는 여기가 이론(theory)의 자리.)     


1. 어쩌면 ‘지식의 존재 제약성’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인간세계에 ‘근본적인’ 특성일지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만하임 역시 근대로의 이행과정에서 세계가 분화하고 이 분화과정이 지식의 상대성과 존재 제약성, ‘사회적인 것’이라는 테마를 어느 정도 새롭게 떠오르게 했다는 근대 사회학자들의 관점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하임에게 근대는 인식론적으로 ‘일원적 세계관’이 붕괴된 시간이다.     


1. 만하임이 비판하는 것들. 하나, 이론적 개인주의. 개인은 한정된 독자성만을 가지며 사실상 개인의 행동은 집단 의지의 구체적 방향과의 특수한 관련성과 연관된 집단적 행동이기도 한데, 개체론적 인식론과 발생론적 심리학은 총괄적인 조직의 의미를 간과한다. , 마르크스주의. 만하임에게 집단 의지를 갖는 집단은 ‘계급’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이는 그가 경직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는 맥락이기도 하다. 한 부분에서는 수직적 운동 내에서 민주화의 실현을 통한 하층 계급 사상의 일반화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서 지식을 ‘상부구조’로 취급하는 방식과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둘의 둘, 이데올로기론. 만하임에게 아마도 마르크스도 이 단계에 머물렀다고 판단할 이데올로기론은 지식의 존재 제약성을 일부 폭로한다는 면에서 지식사회학의 기초 단계이기도 하지만, 적대하고 있는 집단의 지식에 대해서만 그렇게 한다는 면에서 부분적이다. (연대순으로 알튀세르가 더 뒤이지만, 어쨌든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또한 인간은 이데올로기 없이 사고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오긴 했다.) , 자연과학 중심 이론으로서의 경험주의. 사유하는 주체의 분석이나 인식론을 특권화하는 방식은, 의미의 이해와 가치평가적 해석(즉, 질적 측면)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특히 현대의 인식론적 경향은 개별과학에 대한 인식론의 선행성과 독립성에 대한 아집을 가지고 있고, 의미와 실재의 이원성을 무분별하게 전용하는 오직 한 가지 특정한 인식론(즉, 자연과학적 인식 방법)을 사회과학적 대상에게까지 영구화하고 있어 문제다. , 스콜라적 편향. (이는 부르디외가 쓴 말이지만.) 만하임은 지식은 순수한 이론적 관찰 행위로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인식 가운데 극히 미미한 한 단면만을 다루는 순수관념론이나, 추상화와 일반화 단계에만 머무르고 구체적인 것과 교통하지 않는 형식사회학을 비판한다. 만하임은 형식사회학을 부르주아적 내지 자유주의적 논리 전개 방식이라고 본다. (여기서 형식사회학이 짐멜의 그것일까?) 만하임이 주창하는 지식사회학에서는 행위에 구속된, 의지(의미, 가치)지향적인 인식과 지식을 다루면서 구성적이고 원근법적인 새로운 객관성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1. 내가 더 궁금한 것들. 하나, 만하임의 지식인론. 읽은 분량에서는 지식인론이라고 할만한 내용이 딱히 중요하게 등장하지는 않았으나, 여간 만하임은 일정하게 다원화된 세계에서 지식계급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지식계급’으로 전화하게 되었다고 언급한다. (이는 아마 정통 마르크스주의적인 지식계급에 대한 관념과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베버를 언급하면서 지식의 체계화에 대한 의지가 지식인들을 둘러싼 제도와의 상관성 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장field 개념을 떠올리게 했다. 부르디외도 베버리앵이니까.) 지식사회학을 하기 위한 전제로 지식에 대한 ‘간격 유지 과정’이 필수적이라는 언급도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지식계급이라고 말하기에도 오늘날 학자/연구자들이 생활인들에 비해 지식에 대해 갖는 특장점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겠는 상황에서, 만하임은 어쨌든 세계의 통일성 및 영구불변성이 동요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현대적 불안에서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본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더 읽어보면 뭐가 좀 나오려나 생각하긴 한다. 사실 만하임의 지식인론이 버크의 텍스트에도 살짝 언급되는데,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유리돼 있다는 사실 때문에, 지식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사회적 흐름들을 볼 수 있다”(17쪽)는 그 차이가 여전히 한계적으로라도 존재하는 것인지 고민. , 지식의 상대성과 존재 제약성이라는 사실은 정치 토론과 학술 토론이라는 이념형 사이에서 실제 과학적 이론의 위기를 발생시킨다. 결국 지식사회학이 존재 제약성을 끝까지 밀어붙였을 때, 지식사회학은 모든 관찰자가 입장에 구속되어 있으므로 더 보편적이고 원칙적인 것을 발견해내기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지식사회학 그 자체, 스스로의 지위마저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상길 선생님 논문 ‘문화연구의 아포리아’에서도 그 ‘아포리아’가 비슷한 지점이었다는 것이 생각난다. 텍스트에서 읽은 바로는 만하임은 참여나 관여가 왜곡이나 부정확과는 다르다는 관점을 통해서, 그리고 결국 지식생산에서 감지되지 않는 무의식에 대해서도 체계적으로 탐구함으로써 (다른 말로는 성찰성을 발휘함으로써) 지식사회학의 총체적 기획을 완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지만. , 지식사회학이 하는 일은 폭로나 노출시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 것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 폭로와 노출이 1929년 당시 “모든 집단에 공통된 그러한 단계에 도달”(127쪽)했으며 그러한 이유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사유 일반에 대한 신뢰마저도 파괴해버리는 결과”(129쪽)가 나타났다고 만하임이 이야기하고 있다. 앞서 두 번째에서 얘기했던 내용과 거의 비슷하기는 하지만, 오늘날 특히 더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듯한 다양한 지식들의 체계(예를 들면 요즘 제일 고민은 스까페미와 TERF와 안티페미.. 뭐 이런 것일텐데) 사이에서 지식연구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된다. 더불어 1929년의 고민이 2018년에도 너무 유사하게 울림을 주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그래왔지만 인간은 살아왔다’는 게 위안이 되어야 할 것인지 이런 생각도. ,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개념. 책 제목이기도 하거니와 두 개념을 정확하게 어떻게 정의하고 있으며,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궁금한데, 1부에 아주 잠깐만 언급되었는데 정확하게 감이 안 와서. 빨리 2부를 더 읽고 싶다. 다섯, 만하임은 지식사회학 연구자들이 발휘하여야 할 지식의 존재 제약성에 대한 탐구와 일반 실천가(practitioners)의 존재 제약성의 인식 사이에 어떠한 차이를 설정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궁금증이 있다. 사실 이러한 자기 위치성에 대한 성찰성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계급적으로 차등 분배되는 경향이 있는 성향 체계의 일부이기 때문에, ‘성찰성의 승자들’과 같은 개념도 있는 것일 테다. 존재 제약성을 인식한 상태에서 생산되는 지식 혹은 실천/행동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어떤 면에서 ‘우월’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가? 여섯, 만하임이 쓴 같은 해에 쓴 <세대 문제>가 한 차례 언급된다. 개인적으로 <세대 문제>를 읽었을 때 느꼈던 만하임의 어떤 간결하고 논리구조가 아주 탄탄한 그 느낌을 이 책에서는 아직 조금 덜 받기는 했는데, 아무튼 “세대의 교체와 경쟁이라고 하는 현상이 정신사적 영역으로 끌어들인 운동의 리듬”이 있다고 쓴 문장을 보고, 한국 학계에는 그러한 (학술) 세대의 계승이 아닌 갈등적인 교체나 경쟁이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해 고민이 들었다. 내가 아는 좁은 사례에 한정하면 국문학에서 문화연구를 하는 오혜진 씨가 ‘K-비평의 종말’ 같은 논쟁적인 글들로 이러한 경쟁에 뛰어드는 젊은 사람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 같은데, 어떤 집단적/학파적 움직임이라든지 혹은 그냥 그런 개인 여럿이라든지. 있는 게 좋기는 한 것일까? 없어도 그냥 괜찮은 것일까?     


1. 버크의 글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들. 하나, 버크는 흔한 예시이기는 하지만 구텐베르크로부터 시작하여 지식사회학에 있어서 ‘매체’의 중요성에 관해서 짧게 이야기한다. (25쪽) , (날것의) 정보와 (가공된) 지식의 구분. ars와 scientia, practice와 theory의 구분. , 지식이 반드시 진보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 (28쪽) 지면의 물리적 한계, 혹은 인간 뇌의 생물학적 저장용량 한계로 인해 생겨나는 선형적 진보의 불가능 이슈.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의 수를 150명 정도로 한정한 ‘던바의 수’가 생각나는. 그리고 최근 70년대생 이후로 IQ 평균이 하락하고 있다는 기사가 생각나는. , 지식인과 ‘전문가’ 사이의 교류에 관한 내용이 인상적이기도 한데 (30-31쪽), 여기서 전문가라고 불리는 ‘다른 종류의 지식’의 보유자들은 오늘날 연구에서 연구참여자가 하는 역할이랑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인가? 다섯, 마키아벨리 이야기(32쪽)에서, 사실 연구라는 것은, 특히 지식연구라는 것은 어떤 지식의 ‘존재 제약성’이든 드러나지 않은 생산원리이든 실제 지식의 어떤 화법적 전략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폭로하는 의미가 있는데, 마키아벨리가 정치가와 통치자들 사이에서 소란을 일으켰던 것처럼, 예컨대 내가 청년활동가들의 전략을 어떤 식으로든 재현하는 것이 갖는 문제가 있을 수 있겠다 하는 아주 고전적이고, 쉽지만, 동시에 해결되지 않을 고민.     


1. 버크의 글에서는 레비스트로스와 푸코 등을 이야기하면서 분류(classification)와 범주(category)의 문제를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 (내가 같은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서 기록.) “이런 책에 대한 필요가 특히 절실한 분야는 보통들 하나의 분야라고 아예 생각하지 않고 차라리 학문 분과들을, 아니면 서지학, 과학사, 독서사, 지성사, 지도 제작사, 역사 기록사 같은 하위 분과들을 모아 놓은 정도로 취급하는 영역”(버크, 24쪽) (개인적 관심으로 기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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