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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마타 Aug 19. 2018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2)

지식연구 세미나 시즌1 2주차 RP

읽은 것:

Mannheim, K. (1929). Ideologie Und Utopie. 임석진 (역) (2012).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파주: 김영사. 2부, 3부     


2부와 3부는 기대에 비해 지난주 읽었던 것의 변주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대다수였던 것 같다. (다만 상대적으로 3부의 내용이 재밌어서 아마 이번 RP의 중심이 되지 싶다.) 게다가 여전히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특히 유토피아 개념에 대해서는 본격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는데 아마도 4부에 나오는 것 같아서 따로라도 읽어보아야겠다 생각한다. (시간이 급해 정리를 많이 하지는 않고 나열하는 식, LQ of LQ로) ; 지식사회학이 다뤄야 한다고 하는 시대의 총체성 혹은 시대진단에 관한 내용에서 ‘에피스테메’ 개념이 떠올랐다. 호환해서 이해해도 되는 것일까? ; ‘국민, 민족’ 그리고 ‘계급’의 발명에 관한 내용이 경험적 연구의 과제라고 하는데 이런 과제를 제시해주었다는 것은 내 기본 관심사와 부합한다. 감사하다. ; 총체적 이데올로기 개념을 제시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이데올로기론과 자신의 지식사회학을 구별짓는 방식, 존재구속성의 일반적 정당성은 폭로 목적의 연구보다는 몰가치적 연구와 관련이 있다고 하며 상대주의와 (동태적) 상관주의를 혼동하지 말자는 입장, 관점의 존재가 오히려 더 유리한 기회를 마련한다는 관점 등은 지난 시간 논의했던 내용과 일정하게 중복되는 것으로 보인다. ; 사회학적 시대 진단이라는 새로운 분과 발생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가치 판단에 대한 ‘결단’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 2부의 뒷부분에는 특히 멋진 아포리즘들이 잔뜩 등장한다는 느낌이 들어 필사를 여기저기서 했다. ; 


★ 3부에서 만하임은 ‘지금까지는 왜 정치학이 없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때 정치학은 우리가 현대 대학의 분과학문 체계를 바탕으로 알고 있는 정치학과 일정하게 중복되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아마도 사회과학의 실증주의화가 여전히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학이 제도에 대한 통계적 분석이거나 혹은 통치 입장에서의 이론적 접근(‘군주론’)으로 나 같은 비전공자에게 이해/오해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만하임은 이와 같이 정치가에게 필요한 어떤 이념이나 기술들의 총체는 정치학이 아니라 행정학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그가 정의한 정치학의 연구대상인 정치를 다른 지식들과는 상대적으로 다른 차원을 가진 영역으로 설정한다. 행정이 다루는 것이 ‘이미 생성된 것’에 대한 지식이라면 정치는 ‘생성 과정 속에 있는 것’을 다룬다. 이러한 이항대립은 ‘합리화된 영역’과 ‘비합리적 작용 범위’로, ‘재생산적인 것’과 ‘개채적 결단의 영역’으로 다시 반복된다. 더불어 정치의 영역에서 “학자나 사상가는 설 상충하는 어느 한쪽 입장 속에 이미 스스로가 관여”(269쪽)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즉 몰가치적인 위치를 주장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특이하다. 이러한 구분은 3부 전체를 관통하는데, 나에게는 흥미로웠던 점이 바로 이 구분이 세르토가 <일상의 발명>에서 구분했던 전략(strategy)과 전술(tactics)의 구별을 떠올리게 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도 전자는 분명하고 계측 가능한 것이지만, 후자는 모호하고 예상이 불가능하다. 여기에 이어서 만하임이 사회주의에서 이행 혹은 혁명의 순간을 어떠한 식으로 이해하게 되는가를 서술할 때, 세르토를 읽었을 때 오히려 덜 와 닿았던 메티스(metis)의 개념이 더 분명해졌다. (이것이 지식사회학의 힘인가!) ; 


♠ 19-20세기의 정치적 사조를 관료주의적 보수주의, 역사주의적 보수주의, 자유민주주의적 시민 계급, 사회주의, 파시즘으로 나누고 이것 각각을 단순히 개념적 추상의 사상사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정치적 계급 구성 내지는 지배계급 내부의 투쟁의 역사와 연결지어 설명하는 것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이것을 합리화에의 욕망과 비합리성의 필연적인 잔여라는 틀 속에서 설명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의 주지주의적 열망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비합리성의 층위가 발생했다는 설명이나, 마르크스주의를 ‘유토피아적 요소’를 배척하고 비합리적인 것을 합리성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실재변증법으로, “비합리적 행위를 위한 합리적 사상”(299쪽)으로 설명해주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마르크스주의의 합리화는 생산관계, 계급관계(권력양식), 이념세계의 구조적 연관성이나 상동성을 상정하며 만하임의 지식사회학적 기획이라는 것도 결국 이 틀과 커다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 종합화 수행자의 문제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결국 ‘자유롭게 유동하는 지식인’이라는 개념이 다시 한 번 등장하는데, 이때 만하임은 지식인이 갖게 되는 특유의 사회적 위치, 그리고 ‘교양’과 ‘교육’의 효용이라는 제도에서 나오는 의욕과 성향의 축도를 함께 고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주에도 함께 논의를 하기는 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지배계급의 피지배분파”라는 부르디외의 지식인 계급에 대한 일정한 설명과 겹치면서도 오히려 실제로 더 열려 있는 개념인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이번에 읽으면서는 들었다. 또한 인텔리 계층이 어떠한 위치에도 동화 가능하고 어떠한 계급도 임의로 선택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이고 신분적인 한계로 혼연일치는 어렵고 일말의 불안감을 안고 간다는 관찰은 꽤 정확한 것처럼 보였다. ; ♨ 교육의 문제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사고방식에 대한 올바른 상황 분석만 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타당화될 수 있는 정도를 결정할 수 있다”(383쪽)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아마도 ‘그 시대’였어서 가질 수 있었던 만하임의 자신감이나 ‘자연과학 정도로 되고 싶다’는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고 그러한 부분이 이곳 말고도 여기저기 있었다. ; 


☎ 부르주아 정치의 산실로 ‘클럽’을 이야기하고, 강의가 이루어지는 교실뿐만 아니라 아틀리에나 작업실에서의 도제 관계와 같은 (정치적) 지식 전달의 방법과 공간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 역시 지식사회학의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미 하고 있는 것들이기는 하다. 실험실 연구라든가, 온라인스페이스 연구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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