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여름의 기록
어릴 적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1등을 해냈습니다' 하는 소식이 종종 신문을 장식하는 것과는 달리, '보은군' 세 글자가 일간지에 등장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주일에 한 번 오는 <보은신문>이나 <대추고을소식>을 더 좋아했습니다.
드디어 보은군도 1등을 기록하는 날이 왔습니다. '보은군, 국제결혼 비율 전국 1위'. 한 해 동안 새로 결혼한 커플 205쌍 중 국제 커플이 82쌍으로 40%를 차지한다는 기사였습니다. 2006년, 그러니까 제가 갓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입니다. 10년이 지난 지금, 보은군이 또 1등을 차지했습니다.
보은군, 다문화가정 학생 비율(8.4%)
충북 도내에서 가장 높아
보은엔 재학생의 반 이상이 다문화가정 아이들인 초등학교도 많습니다. 돌아보면 놀랄 일이 아닙니다. 제 고향 집 이웃 은갑 아저씨 아내는 일본에서 왔습니다. 아랫말에 시집온 언니는 베트남 사람이었습니다. 옆 마을 대추밭에선 필리핀에서 온 언니가 한국인들의 추석 차례상에 오를 대추를 키웠습니다.
세계화의 흔적과 덫, 기쁨과 슬픔의 현장은 미국 뉴욕만이 아닙니다. 읍내를 다 돌아보는 데 반나절이면 족한 보은군, 그 작은 동네는 사실 가장 넓은 세계가 압축된 곳입니다. 베트남 다낭의 공기가, 캄보디아 이름 모를 마을의 강물이 묻어 있는 보은군은 '가장 작은 지구'입니다.
가장 작은 지구
'보은군'
농촌 지역 다문화가정은 우리 사회의 각종 소외 현상이 응집된 단위입니다. 도농 격차에 따른 농촌 소외, 결혼 '시장'에서 밀려난 노총각들, '사 온' 며느리니까 감수하라는 식의 여성 인권 침해, 남들과 다른 외모로 인한 차별 등 중첩된 소외가 그들 삶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보은에서 나고 자란 저는 늘 서울을 갈망했습니다. 뜻대로 서울에서 살게 됐습니다. 어느 날 문득, 어린 시절 만난 언니들이 그리워졌습니다. '그 언니들은 잘살고 있을까?' 이제 저는 다시 보은으로 내려갑니다.
저 대신 고향을 지키는, 아니 보은군의 새 주인인 언니들과 그 자녀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이 보은에서 살아온 세월은, 제가 고향에서 산 시간과 이제 비슷합니다.
'다문화' 세 글자에 걸맞게 앞으로 제 글에 등장할 주인공들은 태어난 나라도, 언어도, 피부색도, 가치관도 각양각색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정으로 세계 곳곳에서 보은군까지 왔을까요? 첩첩산중 보은에서 그들과 자녀의 삶은 어떨까요? 그들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요?
세계화의 저 밑바닥,
밀리고 밀린 인생 이야기를
이제 시작합니다
슬픔과 분노, 노여움과 한탄만 있는 건 아닙니다. 유쾌한 웃음과 즐거운 희망도 있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 기획이 나와 그들, 그들과 우리 사이를 잇는 작은 징검다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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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