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일 학년이 되던 해 이사를 갔다.
이사 짐을 대충 정리하고 자리에 누운 밤. 한 겨울은 아니었지만 보일러를 쉬지 않고 틀어도, 공사를 막 끝낸 콘크리트 바닥의 냉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를 따다닥 부딪히며 떨고 있을 때, 고목나무처럼 딱딱하고 거친 손이 이불속으로 쑥 들어와 내 손을 잡았다.
사실 사춘기가 시작되던 중학교 일 학년의 나이는,
할머니의 사랑에 가슴이 벅차기보다 시골 노인들의 냄새를 달가워하지 않는 그런 나이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날은 추위 때문인지, 그 거칠고 딱딱하지만 온기 가득한 할머니의 손을 가슴에 껴안은 채 잠이 들었다.
반항심이 아롱아롱 피어오르기 시작하던 그 시절에도 따뜻함 속 사랑을 느껴서일까. 밭일로 까맣고 거칠어진 손이 전해주던 따뜻함은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할머니는 표선이라는 시골 마을에 사셨다. 더 코흘리개 꼬맹이이던 시절, 감귤 밭 가운데 커다란 은행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진 시골집에는
내가 좋아했던 똥개 '독고'가 살았다.
좋게 말하면 셰퍼트를 닮은, 엄마와 아빠 개가 누렁이와 검둥이가 틀림없을 독고가 겨울 어느 날 몽실몽실한 새끼들을 낳았다.
어린 나는 마당 앞 작은 창고 안의 짚단 위에서 독고의 젖을 찾아 꼬물거리는 강아지들을 코를 흘리며 넋이 나간 채 바라보곤 했었다.
밤이면 어린 마음에 강아지들을 집으로 들여와 재웠다가, 할아버지 머리맡에 오줌을 누는 바람에 혼이 나기도 했다.
강아지들이 제법 자라 마당을 빨빨 뛰어다니던 어느 봄날. 햇살 가득 떨어지는 마당 한가운데 의자엔 코흘리개 꼬맹이가 앉아 있었고, 흰 강아지 한 마리가 의자 주위를 빠른 속도로 빙글빙글 돌며 뛰고 있었다.
어린 나는 뭐가 좋아서인지 강아지를 보며 까르르 웃고 있었고, 강아지는 그런 나를 보며 혀를 내민 채 웃으며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그 오른편, 밭으러 가던 할머니가 나를 보며 주름 진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짓는다.
당시 코흘리개의 눈에는 분명 쭈그렁 할망탱구였을 텐데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젊었던 할머니의 모습. 기억 속 그 날의 할머니는 허리도 꼿꼿했고, 삐쩍 마르셨지만 주름도 많지 않은 얼굴로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고작 삼십 대의 나이에도 길거리를 가다 마주치는 아기들의 귀여움에 눈이 가는데, 끔찍이 아끼는 손주 녀석이 까르르 웃으며 강아지와 노는 그 모습이 할머니에겐 얼마나 귀여웠을까.
"아이고 나 아들 착하다"
할머니가 평생 입에 달고 사셨던 말이다. 누나가 할머니에게 항상 손녀는 안중에도 없다며 농담 반 진담 반, 아니 거의 진담으로 불평했을 정도로 할머니에겐 당신의 아들과 그 아들의 아들이 최고였다.
대학 시절 가끔 제주도에 내려갈 때면, 항상 토종닭 한 마리를 술로 노릇노릇하게 삶아 내어 주셨다. 거친 손으로 느릿느릿 살점을 발라주던 할머니의 고마움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어느새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허리를 숙이고 뒷짐을 진 채 남의 밭으로 가, 하루 종일 김을 메어 받은 일당으로 닭을 잡고, 엿을 담그고, 김장을 해서 보내던 그 고마움을. 밤새 술을 마시며 흥청망청하던 젊은 시절에는 알지 못했다.
2014년 12월 사무실.
다가오는 전시회 준비로 한창 바쁜 어느 저녁.
작은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그 전화가 시작이었다.
연락이 뜸하면 혼이나 내시던 엄한 삼촌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창완아...... 할머니가 많이 안 좋으시다......"
가슴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삼촌의 효심이 할머니의 상태를 과장한 것이면 좋으련만.
제주도로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에 가방을 싸고 사무실을 나오는데 이번에는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병명은 대동맥류. 몸을 관통하는 동맥이 부풀어 오르는 병인데 수술할 방도가 없어 약물치료를 계속하고 있었고, 갑자기 통증이 심해져 입원을 하셨다고 한다.
당장 내려올 필요는 없고 주말에나 내려오라는 말에, 내가 상상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 것 같다는 안도감이 들며 힘이 쭉 빠졌다.
주말, 제주도로 내려가는 비행기 안. 제주도에 가까워질수록 자꾸 눈물이 났다. 생각지도 않았던 이별에 대한 예고편을 맛본 나는 온갖 상상을 하며 슬픔에 빠져들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구름 위 어딘가 있을 신이 원망스러웠고, 착륙을 앞두고 눈앞에 펼쳐진 바다의 태평한 잔잔함마저 슬픔으로 밀려왔다.
내가 울면 할머니와 아빠는 더 슬플 거라는 생각에
병원에 가서는 울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그 다짐은 병원 의자에 앉아 있는 가족들을 보자마자 무너져버렸다.
코흘리개 시절 막둥이 기질이 어디 가지 않았는지,
삼촌과 고모, 형과 누나를 보자 나는 마당에서 강아지를 보며 웃고 있던 꼬맹이 시절로 돌아가버렸다.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역시 막내라며 웃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코를 풀었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아빠가 핼쑥한 얼굴로 웃으며 나를 반겨줬다.
할머니는 주무시고 계시다며 내 손을 잡은 아빠는
웃고 있었지만 붉게 충혈된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리고 내 손을 쓰다듬으며 사람은 언젠가 떠나야 하고 그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라며 아름다운 작별을 준비하자고 말씀하셨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였는데,
아빠는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캐럴 대신 에델바이스라는 노래를 불렀다면서,
병원 복도에서 울고 있는 내 손을 잡고 그 노래를 불러줬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 멜로디가 슬퍼 계속 눈물이 났다.
잠에서 깬 할머니를 보러 병실로 들어갔다. 퉁퉁 불은 눈으로 애써 웃으며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아이고 나 아들 착하다"
유독 눈을 크게 못 뜨시는 것만 빼면 할머니는 건강해 보이셨다. 뭐가 그리 자랑스러우신지 퉁퉁 불어 배위로 튀어나온 동맥을 만져보라며 내 손을 잡아 이끄셨다. 이십여 년 전 그날 밤 내 추위를 달래준 손의 온기처럼 뜨뜻한 혈액의 느낌이 배에서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 날의 따뜻함이 주던 위안과 달리, 이 온기가 마지막일 수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할머니는 자꾸 시큰해서 아프다면서도 이제 살만큼 살았다며, 이게 터지면 당신은 죽을 거라고 태연하게 얘기하셨다. 그리고 밥 굶지 말고 잘 살아야 된다는 얘기를 하고 또 하셨다.
병실을 나오자 참았던 눈물이 얼굴과 목을 적셨다. 하지만 할머니를 집으로 모셔 약물치료를 하면 몇 개월은 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얘기에 안심이 됐다.
다음 날,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 할머니와 통화를 했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월요일 아침.
이른 시간 걸려온 누나의 전화.
누나는 말이 없었고, 아빠와 삼촌, 고모, 형의 울음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 나는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화장실 변기에 주저앉아 세상을 잃은 아이처럼 꺼이꺼이 울고 또 울었다.
이제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1년 반의 시간이 지났다.
할머니는 분명 세상에 없는데, 세상에 있을 때보다 더 자주 생각나고 더 많이 보고 싶고 더 크게 그립다.
문득 아빠가 그 병원 복도에서 왜 그 노래를 불렀는지 기억이 났다.
에델바이스 에델바이스
아침 이슬에 젖어
귀여운 미소는 나를 반기어 주네
눈처럼 빛나는 순결은
우리들의 자랑
에델바이스 에델바이스
마음속의 꽃이여
한 평생 자식들을 위해 순결하게 살다 간 할머니는
우리 마음속 눈처럼 빛나는 꽃이 됐다.
안녕,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