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은 그래서 사랑스럽다

by 검정고구마

"눈 온다"

창가와 가까운 사람들부터 하나둘 고개를 돌린다. 빛바랜 머그잔을 들고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로 향한다. 커피머신이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커피를 내리는 동안, 느릿느릿 하얀 궤적을 그리며 흩날리는 눈송이들을 바라본다.

'참 포근하게도 날리네.'

첫눈은 묘하다. 송곳 같은 추위에 지친 어느 겨울 한복판 지겹게 내리는 눈에는 빙판길 걱정, 퇴근길 걱정, 더러워질 신발 걱정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첫눈은 모두가 사랑한다. 단지 처음이라는 이유만으로. 물론 첫눈이 내리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그렇다. 첫눈은 기다리지 않아도 불현듯 나타나 마음에 내려앉는다.

소박한 움직임으로 세상을 하얗게 덮는 첫눈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항상 포근하고 평온하고 사랑스럽다. 누구도 첫 비를 찬양하지 않는다. 낙엽은 그리움 처럼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수북이 쌓여만 간다. 바람과 해와 달과 별빛은 늘 있어야 할 그곳에 묵묵히 있을 뿐이다. 눈은 다르다. 기다린 적도 없는 사람들이 제 발로 찾아온 눈에 ‘첫’이라는 아련한 음절을 붙여 사랑을 준다.


기다림이 희미해지는 것과 달리, 나이가 들수록 첫눈은 설렌다. 서른을 넘기면 무언가를 처음 경험할 기회는 점점 사그라져 간다. 싱그로운 첫 경험의 두근거림이 그리워져서인지, 첫눈의 궤적은 풋내 나던 첫 경험들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에 그린다.


첫 만남. 첫사랑. 첫 키스. 첫 경험. 충분한 예고 없이 나타나 마음을 흔들었던 첫 경험들처럼, 첫눈 역시 불현듯 나타나 우리 가슴을 흔들어놓는다. 이토록 짧은 삶에 단 한 번 마주하게 되는 경험들. ‘첫’이라는 음절은 이를 영원히 추억하라는 꼬리표가 되어 가슴속 가장 아련한 저장소에 그 기억들을 쌓아간다. 하지만, 첫눈은 아련한 기억과 설렘을 매단채 매년 우리를 다시 찾아온다.

첫눈은 민들레 홀씨보다 가벼운 낟알의 모습으로 나폴 나폴 내려앉는다. 빠르지도 무겁지도 과하지도 않은 그 모습은 첫 경험과 닮았다. 성급하지도 지나치지도 않은, 하지만 두근거리던 첫 경험들의 느낌을 첫눈은 매년 겨울 우리에게 안겨준다.

설익은 눈송이를 조금 떼어 겨울바람에 살포시 얹는다. 처음 만난 세상을 더 오래 비행하려는 듯 바람이 남긴 흔적을 따라 천천히 오르내리는 풋풋한 풋눈. 첫눈이 사랑스러운 이유는 그 풋풋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설익은 첫 경험의 풋풋함. 눈이 마냥 좋았던 어린 시절의 순수함에 대한 향수.

첫눈이 하늘을 난다. 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첫 추억들이 하늘로 떠오른다. 풋풋한 기억과 마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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