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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란 Jan 31. 2019

복음의 안목 하나가 백 가지 재능을 넘어선다

복음교육/ 기독교 칼럼


2011년 여름, 중국 상하이에 첫 강의를 갔을 때였다. 그 해는 내가 서른 살이 되던 해였고 해외에 교육을 하러 강사로 왔다는 것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강의 무대에 서기전 몹시 긴장되는 탓에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질문했다. “주님, 강의를 잘하게 해달라는 기도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지만 제게 이유가 있다면 증거를 보여주세요.” 강의는 성공적이었고, 나는 본격적으로 기업 교육의 강사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교육 일정을 마친 저녁 시간에 현지에 모인 경영자들과 만찬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한 경영자가 말했다.

“대한민국 청년들은 정말 불쌍해요. 취업도 못하고 무기력해보이지만 사실 무능해서가 아니라 시장 전체가 포화상태라 그런거죠. 기회가 쉽게 보이지 않고 모든 산업이 이미 경쟁이 치열해서 마치 수면 위에 뜬 기름처럼 탁한 시장이 되었어요. 조금만 세계무대로 눈을 돌리면 무궁무진한 기회가 있는데… 하다못해 유럽의 청정 농토에서 농업을 한다고 생각해봐요. 앞으로는 먹거리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식량부족의 단편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깨끗한 먹거리’가 부족해서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게 될 거에요. 이런 가까운 미래를 볼 수만 있다면, 조금만 세계무대로 눈을 돌릴 수만 있다면 가능성을 발현할 수 있을 텐데 그걸 보여줄 수가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특정한 ‘스킬’을 갖는 것보다 ‘안목’을 갖는 것이 훨씬 더 값있는 것이란 통찰이 마음에 일어났다. 그때부터 나는 ‘안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강의에도 스킬이 필요하고 지식이 필요하지만 수많은 기술을 가지고 화려한 퍼포먼스를 낸다고 해도 영감 있는 한사람을 이기지는 못한다는 것을 날이 갈수록 확인하게 되었다. 모든 일이 다 그랬다. 극단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어눌한 말솜씨를 갖고 있다고 해도 그가 가진 생각이 비범한 것이라면 사람들은 그 생각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이제 와서 수많은 책들이 현대 사회가 ‘영성시대’라는 것을 어필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창조 이래로 인간의 사회는 언제나 영성이 지배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영적인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동생에게 세계를 보는 안목을 길러주기 위하여 중국 북경으로 어학연수를 보냈다.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세계복음화의 그림을 마음에 품기를 원했다. 하나님은 동생이 북경에서 지내는 6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엄마에게 고난을 허락하셨다. 난생처음 엄마는 하루도 청심환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고, 집에 있으면 공황장애를 느끼는 등의 심한 신경쇠약을 보이셨다. 동생에 대한 걱정과 연민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엄마는 점점 더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엄마에게 허락하신 오늘의 고난이 무엇을 위함인지 주님께 물었다. 그동안 감춰져 있던 극도의 불안과 공포, 불신앙이었다.

“엄마, 지금이 바로 영적으로 성장할 때에요. 엄마는 나실인의 조부모가 될거에요. 그 언약을 붙잡아요.”

아직 결혼도 안한 내가 그때 왜 그런말을 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내가 늘 품고있던 생각도 아니었다. 신기하게도 엄마는 그 말에 격동하는 마음이 잔잔해지노라고 고백했다. 하루 종일 걱정과 불안에 몸서리치듯 아프다가도 내가 해주는 언약에 대한 소망의 말은 마음을 개운하게 한다고 했다. 하나님은 그때부터 엄마와 나에게 ‘나실인’의 언약을 주셨다. 나실인 사무엘을 함께 키울 나실인의 아빠를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한지 2개월만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결혼 이후 매일 밤 아빠의 안수기도를 받으며 딸 희수가 태어났다. 그래서 엄마의 카톡 프로필은 ‘나실인의 할머니’가 되었다.

서른 살 때 중국 상해에서 처음 느꼈던 ‘안목’의 중요성은 아이를 키우는 지금도 더욱 확실하게 느껴진다. 교육열의 시작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몰랐는데 막상 아기를 임신하고 출산하여 양육하다보니 육의 욕심은 끝도 없는 것이었다. 때마침 상업주의가 이미 생태계가 되어버린 우리사회에서는 모든 게 다 쇼핑이었다. 아이와 숨소리를 나누고, 눈을 맞추고, 품에 안아주는 것보다는 새로운 도구와 획기적인 물건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라고 아우성이었다. 시끄러운 소리들을 뒤로 하고 홀로 주님 앞에 서보니 각인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기에게 무슨 가치를 전달할 것인가? 영혼 없는 소리만 앵무새처럼 떠든다고 아이가 복음을 받을 리 없다. 단 하나의 복음 전달의 통로는 오직 양육자(부모,조부모,교사등)뿐이며 말이 아닌 영적 전달이 유일했다. 그래서 더욱 좋은 기술로 양육을 하려는 방향이 아니라 내가 그 복음으로 사로잡혀 있는가를 늘 점검하고 다시 깨달으며, 때때로 아픈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야 말로 육아의 ‘원씽(onething)’임을 기억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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