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의 편독에 대해 정말 오랜 시간 고민하고 공부하고 여러 시도를 했다. 학문적 이론으로는 편독이 나쁘지 않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편독을 넘어서는 것이 나쁠 리도 없다는 것을 나의 독서 경험으로 느껴왔기 때문에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경험을 통한 깨달음을 더 신뢰하는 나는 그간 어린이들과 책을 읽고 나눈 경험을 토대로 '어린이의 편독은 나쁘지 않으나 어른 독자가 도움을 준다면 다영역 독서도 가능하며 오히려 독자를 넘어 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전제되어야 하는 것과 주의할 점이 있다.
우선 다영역 독서를 시도하려면 '즐기는 독자'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어떤 분야든 즐기고 읽는 책이 있어야 한다. 즉 나는 어떤 책을 좋아하는 독자인지 스스로 독자 정체성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어린이들은 보통은 읽기능력도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다른 책읽기에 아주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가끔은 내가 다른 분야 책을 읽고 신선한 자극을 받는 것처럼 어떤 형태로든 그것을 표현하기도 한다.
문제 상황은 보통, 자기 독서영역도 확보되지 못했는데 골고루 읽기를 시도했을 때 발생한다. 최악의 경우라면 책 자체를 거부하고 싫어하게 되는 것이며 이는 언제나 어린이 독서교육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부분이다.
두 번째는 다영역 독서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한다. 다영역 독서를 원하는 분들도 있지만 반대의 경우도 많다. 우리 아이는 과학을 충분히 좋아하고 잘 보는데 이야기책도 읽어야 하나? 역사도 읽어야 하나? 의문을 가지는 분들도 있다. 아이의 독서를 충분히 지지하고 만족하고 있는데 여러 책 정보에 불안해지거나 어디선가 편독은 나쁘다는 광고 문구라도 보게 되면 한 번쯤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다영역 독서에 대한 오해가 크다는 것을 실감한다. 어른도 마찬가지지만 어린이의 독서 또한 마찬가지이니, 과학을 읽는 이유가 과학자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역사책을 읽는 이유가 역사학자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경제학자가 되려고 경제책을 읽는 것 또한 아니라는 것이다.
독서의 이유야 여러가지겠지만 다영역 독서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교양을 쌓기 위한 것이다. 교양이라고 하니 왠지 있어도 없어도 될 것 같은, 있으면 더 좋으면 잔치국수 위의 고명 같은 거라고 오해할까봐 설명을 덧붙이고 싶다. 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교양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데 그 이유는 그건 우리가 사회 속에서 타인과 관계 맺고 사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데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타인에게 죄짓지 않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이 독서라는 것이고 그러려면 사회를 보는 시선을 넓혀야 하는데 그 방법이 바로 여러 분야 책을 읽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린이의 다영역 독서 목적을 교과 공부에 한정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다른 분야책을 읽는 것이 그 분야에 대한 학자 정도 수준을 갖추는 것이라는 오해도 한다. 이런 오해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매우 많다. 교과서 지식을 담고 있는 책이면 선택 우선 순위에 두는 것이다. 게다가 한 권이 아니라 세트로 구입을 하기도 한다. 책을 읽으면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제대로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 오히려 무거운 책을 선택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다영역 독서를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모든 분야에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으며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자라야 할 필요도, 자랄 수도 없다. 교과 학습을 위해서만 다영역 독서를 하는 것도 아니다. 과학공부 잘하려고 과학책 읽고 사회 공부 잘하려고 사회책 읽고 역사 공부 잘하려고 역사책을 읽는 것이 나쁘지는 않으나 거기에만 목적을 두는 것은 문제일 수 있다.
나는 이번 책에 어린이책을 시, 과학, 역사, 사회, 이야기책 5가지로 분류하여 읽는 법부터 책 선택, 독서 활동에 대한 것을 실었다. 그런데 이 목차를 보고 오해하시는 분이 많았던 것 같다. 어느 인터뷰에서도 '어린이들이 과연 이 다섯가지를 다 읽을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첫 질문으로 하셨다. 아마도 각 분야를 전문적인 수준까지 읽는 것으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나의 이야기를 쭉 들으신 후에는 교육 전문가이지만 초등 독서에 대해서는 잘 몰랐는데 정리가 되었다고 하셨다.
무엇보다 어린이책을 잘 들여다보면 얼마든지 어린이들과 여러 도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린이 독자를 대상으로 한 어린이책은 어린이 독자의 특성을 많이 배려하여 만든다. 어린이책은 그 분야 전문가가 쓴 책보다는 스토리텔링 능력이 뛰어난 작가가 쓰고, 전문가는 감수를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대상 독자가 어린이라는 것을 고려해서일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독서가 무엇인지 몸으로 느껴보기도 전에 너무 많은 책더미 속에서 살아왔다. 좋아하지 않는 과학이 몇 십 권 세트로 들어왔을 때 고통 받았을 것이고, 싫어하는 역사가 몇 십 권 전집으로 들어왔을 때 책으로부터 더 도망가고 싶었을 것이다. 독서 상담을 하면서 '아이가 집에 있는 000 시리즈, 000 전집을 읽지 않아 고민이에요'라는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정말 수도 없이 들어왔다. 늘 그렇지만 아이는 문제가 없다. 그 책과 그 책을 접근시키는 방법에서 무리했던 것은 없었을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어린이는 평생을 학습자로만 살지 않고 모두 학자가 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어린이들에게는 책을 읽을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을 해치지 않는 교양인으로 살기 위해, 조금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해 '읽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어린이를 독자로 키우고 싶다면 우리 어른들이 먼저 독자로 살아가면서 어린이들의 이 읽을 권리를 존중해 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