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란 인간상 - 전편

오늘은 조금은 부끄러운 과거를 얘기해볼 생각이야. 내가 어린 시절에 부러워했던 인간상에 관한 거지.


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애니메이션에 빠져있는 녀석이었어. 대부분의 시간을 ‘투니버스’나 ‘재능TV’같은 채널에 할애한 시절이었지. 아쉽게도 난, 친구들과 밖에서 노는 게 싫었던 녀석이라, 애니메이션에서 인간의 모습을 배운 녀석이야…….


당연히 난, 대인관계가 전혀 매끄럽지 않았어. 친구와의 대화나 놀이에 별로 익숙하지 않았고, 오히려 세상이 만화 속 세상처럼 흘러가지 않는 것에 의문을 가지는 지경에 이르렀지.


난 점점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처음 내놓았던 해결책은 그리 신통한 것이 아니었지. 그건, 애니메이션 속 인물처럼 행동하며 문제를 처리하자는 거였어. 언제 생각해도 웃기고 부끄러워지는 발상이지만, 당시엔 그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지 ㅎㅎ.


그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여긴 것엔, 아직 동심이 살아있는 시절인 점도 있겠지만, 만들어진 세계에 흔하게 느끼는 안정감이 크게 작용했을 거야. 물론 작가는 이야기 안에, 갈등이 살아 숨 쉬는 순환을 만들고 다듬은 거지만, 현실의 디테일엔 도무지 미치지 않는 것이지. 난 현실보다 골치 아픈 세계관이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


아직 만들어진 세계와 현실을 구분하고 싶지 않았던 시절에(지금도 그러고 싶긴 하지만), 내게 애니메이션의 세상은 납득할 수 있는 지혜의 덩어리였어. 그것이 ‘한정된 세상’이라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기 전에, 현실의 문제도 애니메이션처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지.


어쩌면 난, 앞으로 오랫동안 찾아 해맬, ‘방법론’의 쾌감을 그 시절에 느끼고 있었는지도 몰라.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든 해소되지 않는 작품이란 흔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만들어진 이야기의 인물처럼 갈등하며 행동하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여긴 거야. 그래서 만화로 된 논어나, 권선징악을 다루는 동화, 신비한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애니메이션에 정답이 있다고 여기고, 인간이 수 만년동안 어리석었기에 이상한 세상이 유지될 뿐이라고 여긴 거지.


내 ‘인간혐오’의 기원을 더 탐색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해도 돼. 세상의 문제는 나중에 내가 어른이 되면 천천히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건, 당시의 내게 사교성에 문제가 있었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애니메이션에서 바람직한 인간상을 모방했다는 거야.


말이 좀 길지만, 그저 멋진 만화 영화 캐릭터를 따라했다 정도의 얘기지. 내가 모방하고 싶어 한 인물은 주로, 그 이야기에서 ‘멋짐’을 담당하는, 주인공의 라이벌 캐릭터였어. 내 세대 사람들에겐 <베르세르크>의 그리피스, <데스노트>의 L, <슬램덩크>의 서태웅, <나루토>의 사스케 등으로 기억되는 인물상이지. 내겐 진심으로, 이런 캐릭터들처럼 능력 있고 쿨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꿈꾸던 시절이 있었고, 서른이 된 지금도, 그런 꿈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장담할 수 없는 수준이야.


물론 그들은 특유의 매력을 가진 캐릭터이지만, 내게 그들이 ‘멋지게’ 보였던 이유를 돌아보면, 내게 가장 난감한 문제가 그들에겐 전혀 장애물이 아니었기 때문인 거 같아. 적어도 그들은 모두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주인공만큼의 성장통을 겪는 인물이 아니었거든. 나중에야 그런 인물상에 주인공만큼의 ‘감정적 통증’을 부여하는 게, 효과적이기 어려운 전략이란 걸 알게 되었지만, 당시의 나에게 그런 점은 ‘무결점’의 인간상으로 다가왔던 거야.


‘무결점’의 ‘쿨한 캐릭터’에게 내가 느낀 부러움이란, 그들의 인생에 ‘관계로 인한 감정적 난해함’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거야. 그들은 미형의 외모를 갖춘 것만이 아니라, 주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언제나 당당하며, 어떤 문제든 주인공보다 훨씬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거든.(나중에는 현실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서, 더더욱 증세가 심해진 시기도 있었지. 난 그런 ‘무결점’의 이상이 실존한다는 확신을 얻고서, 그들을 열심히 흉내 내곤 했어.)


난 그걸, ‘자기에게 아무 문제없게끔 만드는 능력은 멋있는 것’이라는 수식으로 받아들였어.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런 사람을 목표로 하게 되었지. 내 가장 오래된 기억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난 세상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거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들에게 귀찮거나 불편한 것이었고, 그런 인지의 불일치가 불가피한 감정의 파도를 자주 겪도록 하는, 그런 생애를 살아왔어.


삶에서 원하지 않는 동의를 해야 할 때마다, 내가 가상과 현실의 ‘쿨’한 인물들처럼 용기와 능력을 갖추길 강하게 염원했고, 여전히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내가 잔류하고 있어.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어리석은 행동이지. 난 결국, 나 자신을 개조하길 바라는 나약함을 받아들이지 못한 거야. 스스로 별 거 없는 허풍쟁이로 만들었지. 자유와 지혜와 낭만을 노래했지만, 스스로를 묶고, 삶이란 여행을 외면한 거야. 심지어 그런 자신을 가리는, 멋진 장막을 물색하고 있었지.


하지만 최근, 이런 ‘인간상’의 허물을 벗을 수 있는, 거대한 힌트를 얻었어.(자신의 치부를 들추는 글을 쓰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잖아? ^^) 그건 ‘내가 바라는 인간상’을 이상적인 것에서 끌어내리고, ‘내가 될 수 있는 무언가’로 교체하는 작업이야. 물론 이게 무슨 말장난이냐고 생각할 테니, 내가 의도하는 바를 여과 없이 알려줄 거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야기의 인물과 닮고 싶은 마음’과 ‘자신에 대한 이해’는,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거야.


당신이 흥미로운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이 관문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게 도움이 될 거니, 들어봐. 앞에서 절망적인 얘기를 했지만, ‘등장인물의 인간상’에 어느 정도 집착을 가지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되지 않아. 아니, 오히려 ‘이야기’라는 것에 흥미를 가지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겪게 되는 현상이야.


중요한 건, 그 ‘인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비하느냐에 달려있어. 나처럼 본받기 위한 모방을 선택할 수도 있고, 금전적인 비용을 지불해서 탐닉할 수도 있지. 가능한 모든 소비수단에 ‘얼마나 의존적이냐? 스스로 적정한 선을 어디까지 정하느냐?’의 문제를 정리하다보면 자연스레, ‘난 어떠한 이야기에 나오는 어떤 캐릭터인가?’라는 자기이해에 도달하게 돼.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면, 당신이 빠져들었던 매력적인 세계관과 함께 걸어가는 삶을 시작할 수 있어. 물론 그 세세한 내용과 실상은 기존의 그것과 매우 다른 것이겠지만, 그것은 그만큼 당신의 이상을 더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고, 내 현실을 조금 더 이상에 가깝게 변화, 적응시키는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하는 거지.


그 자세한 사례는 후편에서 풀어나가는 게 좋을 거 같아. 이 글도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신나 버려서, 조금 더 세세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버렸어. 언제나 그랬듯, 이해해주길 바라.


(‘133. 내가 바란 인간상 – 중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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