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133인 중편에서 이어지는 내용이야)
이제 가장 골치 아픈 파트에 도착했어, ㅎㅎ. 난 개인이 다른 객체를 부러워하고 동경하게 되는 현상이 지극히 보편적이며, 그것이 거의 모든 인간에게 ‘이상적인 인간상’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할 계획이야. 그리고 그 목표를 설정하는 방법론이 개인의 삶에 생각보다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려 하지.
아무리 금욕적인 사람이라도, 삶 속에서 최소한의 ‘목적’을 가지기 마련이야.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추상적인 표어나 골인지점일 수도 있지만, ‘목적을 이뤄낸 인물’의 이미지로 이루어질 확률이 제일 높아. 아무리 ‘세계 제일의 축구 선수’나 ‘월드컵 우승’등의 목표를 세워도, 결국 메시나 호날두같은 ‘인물상’을 쫓아가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 된다는 거야.
자신의 ‘목표’가 아무도 이뤄내지 못한 것이어도, 그것의 추구 과정에선 그 목적에 가장 근접한 누군가를 연구해야 하고, 그것을 이뤄낸 ‘자신’이라는 이상적인 자아를 구축할 필요를 느끼게 될 거야. 이 현상은 우리가 기초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시작하여,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정의하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사회성과 명예욕, 역사의식까지 폭넓게 발생하고 있지.
개인적으론 ‘안주하는 삶’은 있지만, ‘완벽한 상태나 만족’은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해. 적어도 개인의 추구에서 발생하는 ‘이상’이라는 ‘자유’는, 모든 개인에게 분명한 불씨가 되어주더라고!
내게 ‘우솝’이라는 해결책도, 사실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일종의 ‘부적’과도 같은 단순한 ‘심리안정장치’에 불과하지만, 분명하게 내가 추구하는 ‘이상’에 가까워지기 위한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거든. ‘우솝’이라는 부적은, 내 삶의 불씨를 더욱 현실적으로 유지하게 해주는, ‘타협의 인간상’으로 기능하는 거야!
나도 갑자기 얘기가 이상해졌다는 걸 알고 있어. ‘이상’을 논하는데 ‘타협’이 끼어든 건, 당연히 부자연스러워. 내가 설명하고 싶은 구도는, ‘이상’이란 그 정도를 떠나서 우리에게 확실한 삶의 의지를 만들어 주고, 그것의 정도를 좀 더 자신의 능력에 맞게 조정하는 용기와 지혜를 갖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이상’이라는 관념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거야.
이 ‘타협의 인간상’에 도달할 수 있는 지혜를 설명하기에, 정말로 적절한 고전이 있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 말이야. ‘프로메테우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인간에게 불을 선사한 현인으로 유명하지. 인간에게도 신의 권능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역설하고, 신을 교묘하게 속여 인간의 이익을 챙기고, 신의 징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희생하며, 신의 함정을 꿰뚫는 예언을 하는 인물이야.
그야말로 멋짐의 정점을 찍는 이 인물에게 동경의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지만, 오늘 난 당신이 그런 인력에 의문을 가지게끔 조언해볼 생각이야. <그리스 로마 신화>의 ‘프로메테우스’파트에는 그의 동생인 ‘에피테우스’가 등장하거든. 그의 이름 뜻은 ‘나중에 생각하는 자’인데, 형의 이름이 ‘선각자’인 걸 보면, 이 이야기가 의도적으로 형제를 대비시키는 연출의 이야기인 걸 알 수 있지.
글의 구성에서 ‘프로메테우스’를 돋보이기 위한 ‘목적’을 파악한다면, 그에게 향하는 동경을 훨씬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거야. ‘에피테우스’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 인위적인 몰아주기가 점점 짜증나기 시작할 거거든. 그는 대장장이 신으로서 형과 함께 생명과 인간을 창조했지만, 신의 선물을 다른 동물들에게 모두 나눠줘서 인간의 몫을 주지 못했지. 이는 자연스레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선사하는 플롯으로 이어지는 장치가 돼.
신의 형벌을 받는 형님의 “신의 선물을 받지 말라.”는 조언을 무시하고, ‘판도라’라는 신이 만든 여성(신의 함정)에게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지. ‘에피테우스’와 ‘판도라’의 결혼은 대부분의 인간이 대홍수(신의 징벌)로 죽는 일의 시발점이 돼.
이처럼 ‘에피테우스’는 형인 ‘프로메테우스’와 대비되는 역할로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지만, 신화적인 연출은 이곳에서 멈추면 곤란해. ‘대홍수 이후의 인간은 프로메테우스의 예지를 가지지는 못했지만,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결론까지 파악해야 하거든. 극단적인 대비로 만들어진 두 인물을 통해,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발전의 방향성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는 거야!
다시 ‘이상적인 인간상’ 얘기로 돌아와서, 이야기 전체의 뜻을 파악하기 전에 섣불리 ‘프로메테우스’를 동경하는 건 적절하지 않아. 그는 애초에 ‘현명한 신’으로 설정되었고, 용감한 행동의 징벌을 기꺼이 감내하는 모습을 보이지. 이 정도면 거의 초월적인 존재야. 현실에서 이런 인간상을 실제로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울 거라고.
같은 방향성으로, ‘에피테우스’를 마냥 어리석고 부족한 존재로 여기는 것도 적절하지 않지. 이 인물은 우리와 비슷한 과오 속에 살아가고, 언제나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지만, 나중에라도 ‘생각’을 하며 발전하는 존재야. 신화 속에서 ‘에피테우스’라는 인물이 직접적으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아니지만, 그는 인간의 ‘어리숙한 나약함’이나 ‘저급한 비겁함’, ‘허울뿐인 자존감’ 등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우리의 역사 속에 항상 함께하는 과제로 남아있는 거지.
내가 역설하는 ‘타협의 인간상’은, 이런 인간 본연의 모습을 인지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의 수정이야. 이야기 속 인물의 완벽함이나 현실 인물의 대단한 성과에 취하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인간의 부족함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거지.
이런 통찰은 마블사의 <아이언맨> 영화 시리즈에서 잘 활용되고 있어. 하이테크 슈츠로 히어로 활동을 하는 ‘토니 스타크’라는 인물은 억만장자에 위트 있고 강력한 기술력을 뽐내지만, 오만하고 퇴폐적이며 정신적 트라우마나 불안 증세에 시달리는 인물이지. 매 시리즈마다 ‘토니 스타크’는 자신의 정신적 나약함이 낳은 갈등을 직면하고, 그걸 내면에서 해결해내는 것으로 소중한 사람을 지켜내. 내겐 <아이언맨>을 필두로 하는 마블의 <인피니티 사가>란, ‘<진정한 영웅>이란, 인간의 이런 ‘에피테우스’적인 면모를 다듬어 내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성실하게 설파하는 것으로 보여. 몇 번을 생각해도 <그리스 로마 신화>는 정말 잘 만든 고전이야.
먼 길을 돌아왔지만, 내가 이 글을 통해서 하고픈 얘기는 그리 거창한 게 아니야. 사실, 이미 당신이 충분히 반복 학습한 그 내용이지. 누군가의 서사를 볼 때, 결과나 화려함만으로 동경의 마음을 품는 것은 당신에게 큰 위험이 될 거야. 당신의 현재가 ‘프로메테우스’적 선각자일 가능성은 0에 가까우니까. 우리가 ‘에피테우스’에 가까운 존재인 걸 경험하고 인정하면, ‘프로메테우스’조차 그런 인간상에서 출발할 뿐인 존재라는 걸 알게 될 거야. 당신의 나약한 정신의 한 켠을 강화하기 위해선, ‘인간상’의 타협이 분명 유용할 거라는 걸 기억해. 분명 손해 보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