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내가 바란 인간상>의 전, 중, 후편을 참고해야,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야.
이 내용은 이 책의 <내가 바란 인간상>에서 파생된 건데, ‘프로메테우스’와 ‘에피테우스’의 신화가 현대의 특수한 캐릭터 설정에 영향을 줬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나아가, 이러한 현상(‘타협의 인간상’과 ‘쉽게 혐오할 수 있는 캐릭터’가 정형화되는 것)의 전반이 ‘낭만’을 타협해야 하는 시대상에서 비롯되었다는 글도 쓰고 싶어졌어.
먼저 ‘에피테우스’적인 인물상이 현대에 어떤 특수한 변화를 맞이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어. ‘에피테우스’적인 인물상은 주로 ‘주인공’에 해당하는 인물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로 사용되어 왔지. <셜록홈즈>의 ‘왓슨 박사’나 <삼국지>의 ‘장비’, <흥부전>의 ‘놀부’가 그러해. 여전히 많은 작품에서 ‘에피테우스’적인 인물을 이렇게 사용하고 있지만, 최근엔 사뭇 다른 형태의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어.
‘에피테우스’적인 인물상은 ‘확인하기 껄끄러운 인간군상’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런 것을 전면에 내세워 작품 전체에서 탐닉하는 시도나, 의도적으로 한 인물의 ‘솔직한 면모’로 집어넣어서 ‘넘나들 수 있는 선’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이 그러해.
전자는 인간의 전쟁광적인 면모를 다루는 <헬싱>이라는 작품과, 뒤틀린 정의를 계속 제시하는 <데스노트>같은 작품을 말하는 거야. 두 작품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작품이라는 얘기가 아니라, 독자가 스스로 인류사에 껄끄러운 의문을 품을 수 있게, 치밀한 짜임과 씁쓸한 뒷맛을 곱씹게 하는 명작이라는 거지. 난 이런 형태의 이야기가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가 1975년에 발표한, <하이라이즈>라는 소설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보고 있어. 이 작품도 인간의 잔혹함을 잘 표현한 작품인데, 이 글에서 소개한 글 중에 딱 하나만 보겠다면, 이 책을 추천하도록 할게. 고전은 괜히 고전이 아니거든.
각설하고 이 글에서 중요하게 다룰 부분은 후자(의도적으로 한 인물의 ‘솔직한 면모’로 집어넣어서 ‘넘나들 수 있는 선’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인데, 주로 이성의 육체에 대한 호감을 유감없이 표현하는 캐릭터가 그러해. <란마 1/2>의 ‘핫포사이’나,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의 ‘미네타’, <단다단>의 ‘킨타’가 그러하지.
이 세 인물 간의 이른바 ‘호색한 레벨’은 많이 다르지만, 일관적으로 독자들에게 불쾌함을 느끼게 하는 면모가 두드러져서 선정하게 되었어. ‘핫포사이’는 여자의 팬티를 광적으로 수집하고, 언제나 귀여움이나 유머를 내세우며 젊은 여성과의 신체접촉을 노리는 인물이야. ‘미네타’는 전자보단 덜 적극적이지만(적어도 광적인 면모를 보이진 않는다고 판단했어.) 캐릭터에서 의도하는 본질은 거의 같고, ‘킨타’는 호색한과는 가장 거리가 있지만, 이른바 사람의 ‘덕후 기질’을 외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캐릭터이지.
물론 이 세 인물을 가볍게 ‘만화적 개그요소’로 넘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남녀를 막론하고 이런 인물상에 전적인 호감을 가지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일 거야. 이 세 인물도 의도적으로 독자에게 ‘솔직한 껄끄러움’을 느끼게끔 고안되었지만, 그 본질이 ‘에피테우스’적 발전으로 나아가는 형태를 상상하기 힘들거든.
난 이런 개그가 목적인 인물을 ‘혐오의 인물상’이라 이름 붙이려 해. 독자가 껄끄러운 웃음과 스며 나오는 혐오를 동시에 느끼게 고안되었고, ‘인간상의 표현이 어디까지 솔직할 수 있고 어디까지 상대적인가?’라는 질문을 의식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형태의 캐릭터상이지.
이 주제는 여러 측면으로 접근할 수 있는데, 프로이트가 제안한 ‘리비도’라는 개념으로 시작하려고. ‘리비도’는 정신분석학에서 성적인 에너지와 관련된 개념으로, 성욕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의 여러 측면을 이끄는, 근원적인 정신적 에너지와 충동을 의미한다고 해. ‘핫포사이’와 ‘미네타’는 성적인 에너지와 크게 관련된 인물이고, ‘킨타’는 ‘성욕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의 여러 측면을 이끄는 근원적인 정신적 에너지와 충동’을 잘 표현하는 캐릭터니, 충분히 좋은 예시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겠어.
사람들이 1차적으로 이른바 호색한이나 여미새 캐릭터에 혐오와 유머를 동시에 느끼는 이유는 ‘리비도’의 표현이 제한된 현실에서 찾을 수 있어. 우리는 이런 캐릭터에게도 현실의 ‘인간상’에 대비하여 간주하는 작업을 실행할 거고(내가 <내가 바란 인간상>에서 얘기한 것처럼 말이야.), 그렇게 떠오른 ‘인간상’은 현실의 ‘리비도’질서에 전혀 조화롭지 않기 때문에, 혐오와 껄끄러움을 느끼게 된다고 주장할 거야.
이런 불쾌한 ‘인간상’의 방출은, ‘에피테우스’적 전통과는 매우 상이한 기법이라고 볼 수 있겠지. 이런 종류의 ‘리비도’적 불만족이 여과 없이 방출될 뿐, 어떤 해소법이나 방안도 제시되지 않으니까. 물론 조금은 솔직하게 ‘호색한’의 면모를 보이는 것에 관대해지는 효과를 기대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런 ‘호색한 인간상’에 대한 해결법을 제시하기 위해 고안된 캐릭터가 아니기 때문이야. 이 캐릭터들은 오히려 우리의 ‘리비도’적 한계를 까발리고, 억압된 표현에 대한 ‘불만’을 최대한 우회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지. 작가는 쌓인 불만을 던지고, 독자는 은연중에 억제된 ‘리비도’를 ‘만화’에서 굳이 재소비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고. 차라리 ‘영화’나 ‘책’이라면 좀 더 나은 시도일 터인데 말이야…….
사설이 길었네. 다시 주제로 돌아오자면, 이런 인간의 ‘호색한’적 면모를 언제나 이런 식으로 소비한다는 얘기는 아니야.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일본 만화’에 국한된 얘기지만, ‘에피테우스’적으로 인간사회의 ‘리비도’ 통제에 저항하고 해결하는 작품과 인물이 있거든.
그건 <천원돌파 그렌라간>이라는 작품과, <나루토>의 등장인물인 ‘지라이야’에 관한 거야. <천원돌파 그렌라간>을 먼저 설명하자면, 앞서 설명한 인간사회의 ‘리비도’적 통제에 전면적으로 도전하는 작품이지. 이 작품은 거대로봇으로 전투를 벌이는 애니메이션인데, 로봇이 주로 사용하는 ‘드릴’이라는 무기와 ‘카미나’라는 인물의 장렬한 죽음으로, 주인공인 ‘시몬’이 ‘남성적’으로 설장하는 일대기를 그린, 철학적으로 상당히 잘 깎인 작품이야. (<천원돌파 그렌라간>에 대한 ‘리비도’적 해석은 유튜브 ‘동두천 애니 박사’ 채널의 <남성 본능의 이야기 : 『천원돌파 그렌라간』>이라는 영상을 참고, 인용했어.)
‘시몬’은 소극적인 캐릭터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남성상’을 상징하고 있어. 반면에 그가 조직의 형님으로 모시는 ‘카미나’는 ‘본능과 직감을 간직한 남성상’을 상징하지. 이 만화는 ‘프로메테우스’설화와는 반대로, ‘프로메테우스’가 ‘에피테우스’적으로 진화하는 구도를 가지고 있단 거야. ‘카미나’는 언제나 ‘시몬’에게 더 적극적이고 세상을 정면에서 관통하는, ‘드릴’과 같은 남성이 되도록 조언하고 훈련시키지. ‘시몬’은 그런 ‘카미나’를 동경하면서도, 스스로 그런 ‘완벽한 인간상’에 도달할 수 없을 거라고 한정하지.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카미나’의 죽음이 트리거가 되어, ‘시몬’도 거대한 ‘드릴’을 통해 자신의 억압된 ‘리비도’를 올바르게 승화시키는 결말을 맞이하지.
<천원돌파 그렌라간>은 언뜻, ‘리비도’를 육체적 본능에서 시작하는 거 같지만, 이 글의 전반부에서 얘기한 ‘성욕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의 여러 측면을 이끄는, 근원적인 정신적 에너지와 충동’이라는, 프로이트적 ‘리비도’이론을 정말 충실하게 실현한 작품이야. 주인공인 ‘시몬’은 단순히 ‘카미나’와 같은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합리적 자아’의 장점과 ‘본능에 충실한 자아’의 장점을 융화 및 승화하는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거든. 앞에서 얘기한, ‘호색한’ 캐릭터와는 사뭇 다르지. 물론 <단다단>의 ‘겐타’는 ‘시몬’과 상당히 유사하지만, 이 글의 말미에서 다시 다룰 수 있을 거야.
이제 <나루토>에 등장하는 ‘지라이야’라는 인물로 넘어가자. <나루토>는 닌자 판타지 세계를 그린 작품인데, ‘지라이야’는 주인공인 ‘나루토’의 스승으로 등장하는 인물이야. 그는 <란마 1/2>의 ‘핫포사이’처럼, ‘호색한 캐릭터’의 표준이 되는 인물이지. 언제나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찾아다니고, 성인 소설을 연재하며, 여탕 훔쳐보기를 일삼고, 접객 술집을 안방처럼 드나드는 할아버지거든…….
내가 그런 ‘지라이야’를 다른 호색한 캐릭터와 구분하는 이유는, 이 인물의 서사가 ‘에피테우스’적 발전으로 완성되기 때문이야. <나루토>라는 작품에서 ‘지라이야’가 이미 최강에 가까운 실력자라는 점까진 <란마 1/2>의 ‘핫포사이’와 다른 점이 없지만, 그가 제자를 통해 ‘유대’의 위대함을 점점 깨우치고, 덕분에 자신의 젊은 시절을 되짚어 보고, 다음 세대에 희망을 맡기기 위해 모든 정렬을 쏟아내는, 그런 최후를 맞이하거든.
<나루토>라는 만화의 초반만 본다면, ‘지라이야’라는 인물에게도 ‘호색한’적 인물상의 캐릭터에게 받는 불쾌함을 똑같이 받게 될 거야. 물론 ‘밝히는 할아버지 캐릭터’ 정도의 개그 캐릭터 인상 정도도 적절하지. 하지만 그의 서사가 쌓이고 완성되면서, 작가가 이 인물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선명하게 발견할 수 있을 거야.
특히 ‘지라이야’의 죽음을 다루는 챕터는, 그의 영웅적인 서사의 완성뿐만 아니라, ‘지라이야’가 ‘사실은 평생 한 여자만 바라본 남자’라는 낭만도 병렬적으로 다루고 있어. 전투에서 그가 최후를 맞이할 즘, 임무에 나간 ‘지라이야’를 걱정하는 ‘츠나데’의 모습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연출을 사용하거든.(스승이 위험한 임무에 나섰다는 사실을 모르는 ‘나루토’의 모습이나 ‘지라이야’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연출 속에서 말이야.)
다분히 의도적인 이 연출은 ‘지라이야’의 ‘호색한’적 면모와 얼핏 상충되어 보이지만, ‘가장 ‘지라이야’다운 삶이 무엇인가?’의 대단원 속에, ‘호색한’적 면모도 그의 삶의 일부로 융화하고 있는 거야. 이렇게 정성스레 ‘여자를 밝히는 할아버지’를 완성해 내면, 리스펙을 보낼 수밖에 없더라고. 단순히 유머와 독특하고 진솔한 캐릭터를 위해서 ‘호색한’적 면모를 사용하는 예와는 다르게 생각해야겠더라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난 단순한 목적을 가지고 ‘에피테우스’적 전통을 따르지 않는 ‘호색한’ 캐릭터를 비판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야. 정확하게는 ‘에피테우스’적 전통을 벗어나는 시도를 다루고 싶은 마음이 앞서고 있지. 여태까지의 서술은 “단순하게 ‘호색한’적인 인물은 쉽게 불쾌감을 유발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으며, 그런 경우는 주로 인물의 서사 완성도가 높았다.” 정도로 이해해 주면 좋을 거 같아. ㅎㅎ 내 서술이 당신의 인내를 시험하듯 진행되는 점은 사과하고 싶네, 하지만 구별을 위해 꼭 필요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해.
(‘142. 쉽게 혐오할 수 있는 캐릭터와 낭만의 타협 – 후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