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하겠다고 선언한 날 이후로 4박 5일의 긴 설 연휴가 주어진 것은 행운이다. 할머니 생신이 곧이니 봄에 다같이 내려오라는 명령에 따라 시골방문이 미뤄진 것도 어찌보면 두 번째 행운이었다.
넘치도록 주어진 자유 시간 동안 나는 하고 싶다, 막연히 생각했던 모든 것에 열중해보았다. 할 일의 리스트를 쫙 적어두고 하나 하나 지워갔다. 하다가 좀 지겨우면 책도 좀 읽고 땅콩도 좀 까먹으면서 쉬엄쉬엄. 놀라운 것은 그 모든 일을 해나가는 과정이 그렇게 느렸음에도 내 하루는 지금껏 내가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길어서 네댓개를 마치고 난 후에도 아직 푸짐한 늦겨울의 햇살이 거실 바닥에 널려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몇 달을 아니, 어쩌면 3년을 하고 싶어 하고 싶다고 발 동동 구르던 일들은 하루 또는 몇 주를 통째로 쏟아 쓰면 그만이었던 일인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선택의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 거창한 용기, 라 할 만한 선택을 내가 내렸느냐 하면 아마도 답은 아니올시다. 나는 지금도 내가 뭘 해야 좋을지 전혀 모르겠다. 여기서 뭘 한다, 는 것은 무엇으로 내 앞가림을 - 떡볶이가 먹고 싶을 때 사먹을 수 있는 정도는 - 해야할 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하고 싶은 것은 산더미인데 그 하고 싶은 일이 꼭 계좌로 연결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이 기나긴 연휴의 끝을 바라보면서 내가 느끼는 건, 나의 행동이 꼭 경제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해도. 해보고 싶다. 글을 쓰다가 지쳐서 죽을만큼 써보고 싶고 파티할 때 빠지지 않은 이름이 되고 싶고 문화기획이라는 거창한 판에 발끝이나마 얹어보고 싶고 모임을 열고 싶고 희망을 주제로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싶다.
이 모든 것들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내가 좀 배고프고 자존심 상하고 외로울지라도. 지금같이 볕이 좋은 오전 11시에 눈치볼 일 없이 커피 한 잔을 타먹을 수 있다면, 나는 일단 그걸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