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우는 신록이 푸른 들판을 노려보며 앉아있다.
한 손에는 세월에 바래진 누런 종이 한 장을 들고, 흐릿한 눈을 크게 떠보려 노력을 한다.
"안녕하세요!"
어린애 하나가 모자에 손을 얹었다가 들어보이며 인사를 한다. 요즘 애들은 통 인사를 할 줄 모르는데 저 청년은 유별나다. 하지만, 허허 웃고 있노라면 재빠르게 비탈길을 넘어 사라져버린다. 언젠가처럼 옛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지겨운게지. 누런 편지에 적힌 꼬부랑 영어글씨를 읽어달라고 했다가 보낸 사람이 누구길래 미국에서 할아버지한테 보내냐는 질문에 희원의 이야기를 꺼낸게 화근이었다. 오랜만에 꺼낸 옛 이야기에 횡설수설 떠든 시간이 길었다. 청년은 그 때부터 가까이 오기를 꺼려하는 것이다.그래도 가기 전에 몇 번이고 물어본 덕에 발신지는 이제 발음할 수 있다.
"할아버지 그냥 제가 적어 드릴게요."
성질반 오기반으로 젊은애가 적어놓고 간 로오스 엔젤레스. 그 편지를 받은 게 벌써 몇 년전이다.
햇살이 따갑다. 해가 중천에 뜬 점심에는 손님이 별로 없다. 다른 때라고 찾는 이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더운 한 여름, 정오에는 더욱 그런 법이다. 끙, 소리를 내며 평상에서 일어선다. 녹슨 철제문이 끼릭 끼릭 힘겨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계산대 뒤 회전 의자까지 후들후들 걸어가 앉으니 한결 낫다. 아버지도 늘 이자리에 앉아 사계절을 보내셨다. 고등학교 졸업장을 들고 달려올 때도 이 자리에서 웃으셨고 아들 친구들이 평상에 앉아 땀을 식힐 때도 이 자리에서 지긋이 바라보셨다. 사내 아이들이 냉장고를 힐끔이면 이놈, 하는 표정을 지으시다가도 으레 사이다 두 어병을 꺼내시는 분이었다. 그 느긋한 성품을 이어받아 평생 이 촌동네를 못 벗어나는거라고, 먼저 떠난 할멈은 툴툴댔었다.
"계세요?"
한참 추억에 잠겨있던 슈퍼 안으로 낭랑한 목소리가 들어온다. 상우는 침침한 눈을 들어 낯선 손님을 맞았다. 마흔이 좀 넘었을까.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고운 얼굴의 여자는 문앞의 냉장고를 손짓했다.
"사이다 한 병만 주세요."
꺼내가라고 손짓을 해야 하는데 상우는 그러질 못한다. 허위허위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철문 밖으로 나왔다.
"제가 꺼내도 되는데."
상우는 소리없는 웃음을 웃었다. 아버지를 꼭 닮은 웃음이다. 아버지는 항상 수퍼 앞에 있는 냉장고에서 손수 음료수를 꺼내 담아주었다. 말수 없는 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친절인지 신념일지 모르겠다.
언젠가 한 번은 평상에 앉아 희원과 노닥거리다가 아버지께 제대로 걸린 적이 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무렵에 교복을 그대로 입고서 하하호호 하는 모습이 방정맞기 짝이없었으리라.
아저지의 따가운 눈총을 버티고 있기 힘들어서 상우가 먼저 버럭 소리를 질렀더랬다.
"아버지 !!"
"뭐 이놈아!"
노기탱천한 목소리에 상우는 잔뜩 겁을 먹었는데 그래도 사내놈이 여자친구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 있는 힘껏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한다는 말이.
"목마릅니다!"
이제 죽었구나, 싶어 고개 숙이고 매타작을 기다렸었다. 하나 둘 속으로 세며 조마조마하던 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린다. 아버지는 말대답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 분이었다. 한 두대 맞는걸로 끝나지 않겠구나, 했는데. 무시무시한 그림자가 옅어지는가 싶더니 끼리릭, 문 여닫는 소리가 두 어번 나고 그걸로 끝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시원한 사이다 두 병이 놓여있었다.
벌써 먼 옛날의 일이다.
상우는 사이다를 꺼내 여자에게 주었다.
"담아드릴까?"
"아뇨, 바로 마실거에요. 안녕히 계세요."
여자는 까딱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상우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 다시 수퍼 철문을 열었다. 시원한 선풍기 바람 아래 앉아 쑤신 무릎을 뻗고 싶을 뿐이다.
의자에 앉은 상우는 아침에 폈던 편지를 다시 꺼냈다. 사실은, 답장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뭐라고 말해야 좋을 지 몰랐다. 어느 때를 추억해야 할지도, 그 수많은 햇수를 어떻게 정리하여 말해주어야할지도- 아득해서, 라는 게 변명이라면 변명. 이었다.
희원의 편지는 45년만에 보낸 것치고는 담담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원래의 성격이 묻어나는 똑부러진 편지였다. 안녕, 기억할 지 모르겠어, 로 시작하는 편지는 길었던 세월의 이야기는 쏙 빼놓고 둘만 기억하는 추억이 죽죽 적혀있었다. 노을이 잘 보이는 언덕은 그대로인지 궁금하다는 둥, 살금살금 숨어들어갔던 수박밭이 터가 좋았는데 혹시 상가같은 게 들어선 건 아닌지 걱정이라는 둥. 희원의 삶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은 많지 않았다. '서울에 올라가서는 편지할 새도 없이 살았네.' 라는 말과 '여긴 아주 먼 곳이야. 말도 다르고 사람들도 다르다.' 하는 정도.
외롭다,도 힘들다,도 없지만 상우는 다르다, 는 그 세 글자를 읽을때면 마음 한켠이 먹먹해왔다. 눅눅한 편지봉투는 아주 먼 곳, 이라는 희원의 말을 뒷받침하는 듯 했지만 그 안을 빽빽히 채운 글씨들은 바로 옆 동네 친구의 안부인사같았다.
조곤조곤한 추억풀이가 잘 지내길 바라. 로 끝맺음될 때면 상우는 헤어지던 그 날로 다시 돌아가곤 했다. 촌스럽지만 그 날 트럭을 따라가면서 조금 울었다.
"희원아, 희원아!"
하얀 손이 트럭 창문 밖으로 흔들렸었다.
"편지할게! 다시 만나!"
숨이 턱까지 차서 쓰러질때까지 달린 후에 모래자욱한 바닥에 앉아 그 말만 몇 번이고 곱씹었었다.
편지할게, 다시 만나. 편지할게, 다시 만나.
상우가 추억에 잠겨있는 동안 낯선 여자는 슈퍼에서 조금 떨어진 나무 그늘로 천천히 걸어갔다.
"엄마 왜 생전 안 먹던 사이다야, 사이다는."
하늘색 스카프를 곱게 두른 여사님 한 분이 홀홀 웃는다.
"옛날에 먹던 생각 나서 그러지."
"옛날에? 엄마 때도 사이다가 있었어?"
"그럼. 동네 명물이었지."
할머니는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으로 그 낡은 슈퍼 벽면을 멀뚱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