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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씨 Dec 13. 2019

분노조절이 안돼서 논문을 뒤졌다.

그XX가 미워서 잠 못 이루는 밤

소리를 지르고, 머리채를 휘어잡고 뺨을 갈기는 상상을 하다가 화들짝 놀라곤 한다.
이런 기분은 최초에 가깝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느꼈던 감정은 늘, 속상함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꼭 찝어서 ‘쟤 때문에 너희가 벌 받는 거야’라고 빈정대는 선배에게도, ‘걔 남자 너무 밝히지 않냐’ 뒤에서 씹어댔던 누구에게도. 답은 주지 않고 쉴 새 없이 반려, 반려만 주었던 대리님이나 ‘왜 그렇게 튀고 싶어 안달이냐’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던 직장 선배에게도 –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왜 나를 미워할까, 나 그런 사람 아닌데.
상처는 받았어도 그게 분노로 갈 정도의 악독한 상황은 없었기 때문인지, 그냥 나라는 사람이 화에 무딘 밍숭 데기라서 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을 향한 분노 데이터가 매우 희박했으므로 분노가 턱까지 치솟는 상황을 주체하지 못하겠더라. 그냥 참기에는 숨만 쉬어도 욕이 나와서 못 살겠다. 무언가 대책이 필요하다. 나는 씩씩거리며 분노에 대한 연구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나보다 더한 분노 상황에 있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극복한 거지?

분노는 사람이 태어나서 최초로 보이는 몇 개의 정서 작용 중 하나다. 위협에 대한 적대감, 잘못된 것에 대한 불쾌감은 사람에 따라 있고 없는 게 아니라 아주 본질적이라는 뜻이 되겠다.
필요 이상의 비난과 욱하는 감정을 다루는 성숙함에 대해서는 지난번에도 이야기한 바 있르므로, 나도 참을 인 자가 최고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참고, 사과하고, 용서했음에도 불구하고 냉장고로 머리를 찍어 누르고 싶은 욕구가 (냉장고를 들 힘이 없어서 다행이긴 한데) 사그라들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용서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까?

분노가 시작되었을 때. 골목 어귀에서 기다렸다가 뺨을 때리고 싶다고 토로하는 나를 말리신 분의 말씀.
‘그 사람의 입장에서 사건을 재구성해봐라’.
그 사람 입장?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지금껏 [그 날, 그 일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저 나이 먹도록 그렇게 무책임할 수 있지?
나였다면 절대 그렇게 못하는데.'
온통 내 입장의 말들 뿐이었던 것이다.
마음을 고쳐먹고 객관화해 보았다. 이렇게 저렇게 살아왔고 그런 저런 상황에 놓인 그 사람을 주인공으로 두고 나를 바라보았더니, 아, 조금은 알 것 같다.
나의 잘못한 면들이 보였다. 그 사람의 대처 방식이 상식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용서를 구하기로 했다.
손편지를 쓰고 리본을 예쁘게 매었다.
갖은 노력 끝에 메시지를 보냈다 - 한 문장 한 문장 쓰기가 참, 어려웠다. 창피해서, 어느 정도는 미안해서, 아직 소화되지 못한 화를 껴안고 겨우겨우 화해를 건네는 내가 못내 안쓰러워서. 이불을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그런데 그 사람은 답이 없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래, 읽씹이었다!
바로 여기서 내 뚜껑이 완전히 열린 것이다.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은 나인데, 이런 마음을 억누르고 화해의 메시지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이걸 무시한다고? 아빠에게 빚을 떠넘긴 삼촌에게 ‘삼촌, 그때는 삼촌이 미웠지만 이제 용서할게요.’ 애써 말했을 때 ‘너네 아빠가 순진해서 그래’라는 말을 듣는 것과 비슷했다.
용서의 과정을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1) 상처를 인지하고
2) 상황을 재구성해서
3) 사과와 용서가 상호작용하는
4) 화해가 시도된다. 그래, 정상적이고 성숙한 인간들끼리는 이런 식으로 화해한다. 그런데 상대방이 ‘난 잘못한 거 1도 없는데?’ 라거나, 도리어 ‘네가 나쁜 년이야’라고 적반하장을 둥둥 치고 있다면? 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뭐 같은 기분 속을 며칠 째 헤엄치고 있었다. 아주 원시적이고 본능적으로 나를 사로잡은 것은 제대로 된 ‘복수’였다.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하자, 그래, 그냥 소송을 하자 얼마를 잃더라도, (아주 단순한 민사소송에도 60만 원이 든다.) 얼마나 더 에너지가 쓰인다고 하더라도! (판결까지 최소 7~8개월이다.)
괘씸, 이라는 단어에 나는 아주 눈이 멀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전쟁 없이 이기는 게 최고라는 말이 괜히 나왔을까. 그저 마음속의 싸움터가 너무 시끄러워서, 뭐라도 하나 터뜨리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악의 화신으로 변하기 직전, 나는 다행히도 새로운 관점을 발견했다.

Enright의 용서 발달 형태 6단계는 최고 성숙한 수준의 용서를 무조건적이라고 명명한다. 나도 용서받았으니까 너도 나를 용서해라, 라거나. 내가 너를 용서했으니 너도 나에게 사과해라, 는 것은 용서 발달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용서는 상대방의 행동과 상관이 없다.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사람 자체에 대한 사랑 때문에 복수에 대한 생각 없이 화해를 유도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해 좋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호의적으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네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나는 너를 좋아해.
이런 수준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거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자애로운 마음씨가 나오는가?

논문은 다시 한번 생각지도 못한 관점으로 허를 찌른다. 과거에 나도 다른 사람의 용서가 필요했다는 것.
처음에는 그 말에 더 화가 났다. 나는 누구에게 용서까지 받을 만큼 잘못한 일이 없어. 오히려 내가 필요 이상으로 용서하면서, 멍청할 만큼 착하게 살았다고!
하지만 조금만 되짚어보면, 그렇지 않다. 차마 부끄러워서 입에 담지 못할 잘못이 나에게 너무도 많다.
그 사람들은 나에게 어떤 분노를 느꼈을까?

진정한 용서란 공정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동정적인 해결책을 추구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용서해봤자 그 사람은 콧방귀도 안 뀔 텐데, 맞다. 그래서 그 사람이 불쌍한 것이다.

분노와 미움이 활활 타오르는 당신. 그 새까만 속마음을 누구보다 공감한다.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용서는 자비를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가해자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한다. 성숙한 인간이 미성숙한 인간에게 베푸는 선물이다. 그리고 우리도 분명히 그런 선물을 받으며 살아왔다.

마음껏 불쌍해하자. 그리고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동정 덕분에 살아온 나를, 가장 불쌍해하자.
아,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도, 그래. 그럭저럭 괜찮다. 측은하다.
거울에 비친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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