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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씨 Jan 16. 2020

내가 싫으면 니가 꺼지세요

나는 나의 보호자가 되기로 했다.

표출되지 못한 분노는 쿵쾅대는 심장에 앉는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어떻게, 어떻게,를 반복하다가.
이번에도 그냥 내가 참자
참는 게 이기는 거야로 결론을 내곤 했다.


돌아보면 바로 그 순간이 내가 비상식적 환경에서 나를 꺼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고,
불합리한 상황에서 내 목소리를 내지 않은 대가는
‘그때 왜 말 안 했어요?’로 돌아온다.
 내 가치를 몰라주는 자리에 스스로를 방치했기 때문에

나를 그 정도로 보는 뻔뻔한 사람들만 남은 것이다.


내가 베푸는 친절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당신에게 보내는 미소도, 먼저 지나가도록 잡아주는 문도,
이따금씩 묻는 안부도. 당연하지 않다.
진상이 갑질을 약속하지 않듯이.
나는 자상함을 약속한 적이 없으니까.


나는 세상 누구에게도 필요 이상으로 고분고분할 의무가 없으며 만약 내가 어떤 배려를 보인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나의 호의이다.
그 행동에 익숙해진 끝에
‘왜 요즘엔 전처럼 나긋나긋하지 않아?’

 라고 질문하는 것이 더 이상하다.
그거야말로 불합리한 것이다.


물론 나는 대부분의 사람이 나를

'정겹고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기억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아니라고 해도, 굳이 붙잡고 설득하지 않겠다.
지금까지는 그랬지만,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자 하는 노력이
나에게 얼마나 못할 짓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호감을 주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망은 언제부터였나.

아마도, 초등학생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일지도 모르겠다.
이상한 것은 내가 인기를 갈망하면 할수록 나는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반 친구들은 내가 지나가기만 하면 수군거렸다.
지독한 따돌림에 전학을 간 안산의 초등학교에서도 2년 동안.
나는 하루 종일 한 마디도 하지 못해 입이 바싹 마른 채로 돌아왔다.
아직도 교실 벽이 무슨 색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항상 바닥과 책상만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애들이 나를 따돌린 이유는 뭐였을까.

특별히 친해지고 싶은 친구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친구는 나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했고 나는 그럴수록 속상함을 표현했다. 유치한 행동을 품어낼 성숙함이 없는 그 시절 또래집단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은 ‘쟤 좀 이상해. 놀지 말자.’ 일 수밖에 없다.


철저하게 혼자인 시간이 열두세 살의 나에게는 너무 외로웠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노려보는 눈을 마주하는 것보다 책의 활자가 푸근했고,
괜히 복도를 돌아다니다가 귓속말을 듣는 것보다 구석에서 혼자 채우는 네모네모 로직이 공평했으니까.
그렇다고 내가 사람을 싫어하는 반사회적인 인물로 자란 것은 아니다.  세 번째 초등학교를 향해 가는 아빠의 조수석에 앉은 순간 모든 과거들로부터 나는 ‘없던 사람’이 되었다. 한두 명씩 친구가 생겼고 나중에는 아주 많아졌다.


중학교 시절 매일 내 미니홈피를 방문했던 사람의 수

대학생 때 페이스북에 게시물을 올리면 눌리던 좋아요 수

입사를 하고 시작한 인스타그램의 팔로워 수

핸드폰에 저장된 사람의 수, 카카오톡 친구의 수.



많다.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충분하다.
고로 호감을 주는 사람이고자 하는 나의 노력은, 성공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굳이 친절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가?
아마도,
지겹다. 지겨운 것이다.


10대 시절, 하루가 멀다 하고 밤거리를 쏘다니며 술을, 담배를, 오토바이를, 남자를, 진득하고 추잡한 추억을 함께한 친구들은 어디에 있나.
대학에서 함께 마신 술을 일렬로 세우면 서울 두 바퀴는 족히 감싸고도 남을 각별한 친구는 오늘 어디서 무엇을 할까.


만남, 다시 이별, 또 만나고, 또 이별.


대부분 삶의 반경이 달라져서 자연스럽게 멀어졌지만
죽고 못 살만큼 가까웠던 몇몇은 이름을 입 밖에 내는 것도 어려울 만큼 생채기를 남겼다.
오늘 영혼을 다 쏟을 만큼 친근하다가도 돌아서면 칼을 꽂을 수 있는 게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사람에 대한 염증이 아니라, 원래 사람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가자는 것이다.

영원히 너를 사랑해, 라는 말을 안 뱉었본 사람이 누가 있으랴, 그 사랑의 맹세를 받은 사람은 지금 새로운 여자와 혹은 남자와 버진로드를 걷는다.


필요 이상의 틈을 내주는 것은 좋지 않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스스로에게 못할 짓이다.
저 사람의 뭘 믿고 나를 내어주는가.
필요 이상의 선행도 좋지 않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온전히 위로하거나, 책임질 수 없다. 만약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건 아주 위험한 오만이다.
내가 도와줄게 라니, 무슨 자격으로.


고로, 서른의 나는 지금까지 30년 하고도 15일 동안 제대로 해오지 못했던 스스로의 보호자 역할을 제대로 해보려 한다. 듣기 싫은 말은 적당히 무시하고, 보기 싫은 사람은 적당히 거르고.


쉼이 있어야 나를 채울 수 있다는 말을 이제야 비로소 피부로 알겠다.
좋은 것을 먹이고 좋은 것을 보이고 좋은 것을 들려줘도 모자란, 한 번뿐인 인생에.
영원히 믿을 수도 없고, 나를 책임질 수도 없는 ‘모를 사람’에게 시간을 내준다는 것은 정말, 아까운 일이다. 그 시간을 오롯이 모아 이 미치광이 같은 세상에서 만난 기적 같은 사람에게 쓰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에게 주지 못했던 좋은 말을 주는 사람, 좋은 것을 보여주는 사람에게.



나를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세상에 대한 불신을 기반으로
만남의 기회를 거절하는 것이 결. 코 아니다.
생이 유한함을 깨닫고 피같이 소중한 시간을 그에 걸맞은 사람에게 쓰는 것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해야
비로소 좋은 사람을 챙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 지 않다.
이 단순한 진리가 박혀있는 사람은 만남을 소중히 여긴다.
결코 약속에 늦지 않는다. 대화하는 시간에 감사해한다.
선물하기보다 시간을 들여 편지를 쓴다.
모바일로 하기보다 시간을 들여 찾아온다.
돈보다 상위에 시간이, 시간보다 상위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나는 마음 따뜻한 셀프 보호자가 되고 싶다.
나를 지키고, 잘 지켜낸 덕에 낭비되지 않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꼭 필요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부어주는 사람이고 싶다.

대화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이 있는가?
굳이 반박하느라 에너지를 쓰지 말자. 그냥 안 맞는 사람인 것이다.
품위 있게 웃어주고 속으로 이 글의 제목을 삼키자.
욕할 시간도 아깝다, 어차피 다시 안 만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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