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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씨 Jan 15. 2020

나에게 밥을 먹이는 아침

베트남 한 달 살기도 아니고 밥 한 끼 먹고 싶다는데.

어제는 참 유쾌한 하루였다.
수업을 하던 분들끼리 서로 소개팅을 해주실 수 있게 주선하는 뿌듯함이 있었고(?) 우연히 식사를 같이하게 된 분이 6년 전 내 남자 친구와 같이 일했던 분이라는 사실에 한바탕 웃기도 했다. 세상 참 좁다고.

얼얼한 마라 국수와 샤오롱 빠오를 먹으며 서로의 삶을 이야기하다가 '번아웃'이라는 주제가 나왔다.

"근 10년간 다양한 일을 하다 보니 스스로가 참 지쳐있었는데 그걸 몰라줬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베트남으로 훌쩍 떠났어요. 한 달 동안 온전히 나만 챙기면서 - 잘 먹이고, 재우고, 쉬니까 채워지는 게 있더라고요."

젓가락에 말던 국수도 내려놓고 이야기하시는 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그래서 베트남에서 돌아온 후 1년 동안은 - 어차피 다시 일을 시작하면 쉴 새 없이 달려야 할 테니 휴식에 집중했어요."

휴식에 집중했다고 하기엔, 지금도 어마어마하게 멋진 무브먼트를 준비 중이시지만. 그래도 그 큼직한 규모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에 있어 조급함보다 설렘이 묻어날 수 있는 것은 바쁜 일상 가운데 나를 챙기는 법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은 배우기 쉽지만 쉼은 배우기 어려운 이 시대에 스스로를 돌보는 법을 터득했다는 점이 부럽다.

'나는 저렇게 나를 아낀 적이 있던가?'

밥상머리에서는 잠깐,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하지만
어제 느지막이 돌아와 잠들 때까지도 이 주제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 밥을 먹기가 무섭게 해내야 할 일들이 있었고, 집으로 돌아와서 잠들기 전까지도 나는 계속 무언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욕심나는 일들이 세상천지에 산재하는 법이니.

그렇게 오늘 아침.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동그랗고 밝은 달을 보면서 문득 김치볶음밥이 먹고 싶더라.
나는 요리를 할 줄도 모르고 자취를 할 때도 뭘 해 먹기보다 엄마의 반찬에 햇반을 돌려먹거나 사 먹기 일쑤였다. 그래서 '김이 모락모락 한 김치볶음밥'이라는 메뉴가 콕 집어 당긴다는 것이 황당했다. 보통날의 나였다면 별일이군, 하고 라면이나 끓여 먹었으리라. 하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어제 만난 그분의 베트남이 떠오르는 것이다. 한 달 동안 베트남에 있자는 것도 아니고 고작 김치볶음밥이 먹고 싶다는데, 그것 하나 못해줄까.

아직 어둑한 부엌에서 냉장고 문을 열고 양파, 마늘, 김치를 꺼내 잘 다졌다. 식용유를 충분히 두른 프라이팬에 각종 재료를 먼저 올리고 밥과 계란을 함께 볶았다. 그게 다였다.

'이렇게 쉬운 거였나?'

동그란 프라이팬 채로 먹을까 하다가 분위기를 내고 싶어서 하얀 식기에 밥을 담고 케첩까지 뿌렸다.
먼 옛날 엄마가 오므라이스 위에 그려주셨던 하트를 흉내 내려는데 잘 안 된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안나는
'날 위한 밥상'.
맛은 스팸이 다했지만 나를 잘 먹였다는 것에 괜히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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