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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씨 Jan 22. 2020

머리채만 잡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진짜 내가 원하는 게 아니올시다.

화해는 어떤 형태로 오는가.      


어제는 꿈을 꾸었다. 몇 달 전 일을 하다가 갑자기 연락 두절이 되더니 돈을 내놓으라던 여자가 꿈에 나왔다. 나에게서 돈을 받아간 것도 모자라 공동체 안에 나를 거론하며 ‘저 여자,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게 해야 한다’고 수소문한 것이, 나에게는 여태 상처였던가 보다.

꿈에서 나는 공교롭게도 기차 옆 칸에 앉게 되었다. 방긋방긋 웃으며 동행하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모른 척 하자, 했지만 결국 참지 못했다.      


‘좋니?’     


꿈에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당황한 모습으로 답이 없자, 재차 묻는다.     


‘남의 돈 그렇게 받아가니까 속이 시원해?’     


‘....’     


‘뭘 잘났다고 내 욕을 그렇게 하고 다녀? 양심 없어?’     


그녀는 뭐라 뭐라고 반박을 했고 그 모든 게 같잖았던 나는 머리채를 잡고 흔든다. 신랄한 욕이 내 귀와 목과 입으로 새어 나와서 그녀와 나를 흔들었다.


소리. 오래 묵혀있던 소리, 소리들이 스멀스멀 새어 나와 기차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순간,

꿈속의 모든 장면이 일시 정지되고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네가 원한 게 이거야?     


이런 추잡한. 아침 드라마에 나올 법한 상황이, 내가 그녀에게 원한 복수였냐고 묻는 듯했다.  

   

네가 정말, 원한 게 이거야?     


한숨. 맥없이 머리채를 놓았더니.

기차도, 차창 밖의 풍경도, 신명 나게 쥐어뜯던 머리카락도 모두 사라졌다.

가쁘게 숨 쉬는 새벽 다섯 시 반의 나만 남았다.


내가 오늘 아침의 꿈이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는, 지난번에는 꿈속에서 얻어맞던 사람이 나였기 때문이다. 어두운 방에, 밧줄로 묶여서 얻어맞고 있는 동영상을 사시나무 떨 듯 보고 있는 꿈이었다.

이게 나라고? 이게 나라고?를 반복하면서.    

 

머리로는 알고 있다.


이런 일에 붙잡혀있을 시간 따위는 없다. 그 시간에 앞으로, 더 앞으로 전진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내가, 겪었던 불행에 대해 의기양양해지는 방법이니까. 그래서 낮동안의 나는 최선을 다한다. 계획서를 쓰고, 제안을 하고, 미팅을 하고, 도전을. 한다. 모든 일들이 나의 계획대로 흘러가 주지는 못할지라도, 최고가 되어있을 나는 변함이 없다는 마음으로 그저 걷는다, 모든 잡소리들을 음소거하고.

하지만 밤이면. 침대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는, 그 무의식의 시간에는 어찌할 방법이 없다. 나는 아직도, 내가 당한 불합리에 화가 나고, 지금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머리채를 잡아 흔들고 싶으며, 시원하게 욕 사바리를 부어주고 싶은 가 보다.


다행인 것은. 꿈에서 이 싸움이 반복될수록 일상생활에서의 나도 조금씩 괜찮아진다는 것이다. 점점 더, 이 문제가 붙잡을 수 없는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이기를 소원해본다. 불가사리를 조롱박에 넣으면 쉴 새 없이 부딪치지만, 바다에 넣으면 어디에 굴러다니는지 알 수 없는 법이니. 문제를 없앨 수 없다면 테두리를 넓히는 것이다.

나는 모두에게 이 법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사납다 못해, 무자비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가정을 하나 해보자.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이유 없이 폭행을 가했다. 피해자는 오랜 시간 준비한 끝에 합격한 상을 받으러 가던 중이었다. 혹은 면접을 보러 가던 중이었다. 혹은 아파트 청약, 아무튼 놓치면 안 되는 어떤 것. 그 날의 불참으로 인해 수상은 취소되었고 피해자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얼굴의 멍과 팔다리의 생채기는 몇 달 사이 아물었지만 무차별적으로 쏟아진 가학적인 욕설과 구타, 그 사건으로 인해 놓쳐버린 것은 눈을 감기가 무섭게 떠오른다.


‘내가 준비한 세월이 얼마인데 고작 그까짓 인간 때문에 여기서 멈춰 설 수는 없어.’

    

피해자는 생각한다, 동시에 좌절한다.

머리로는 알지만 몸으로는 도저히, 아무것도 실천할 수 없는 것이다.      


나에게 도대체 왜 그랬어,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도대체 나에게 왜.      


갈 곳 없는 불만이 일어서려는 그의 발목을 잡는다. 억울해, 억울해.     


가해자는 세상에 없던 사람 같다. 사과도, 변명도, 아무것도 없이 유령에게 맞은 듯한 트라우마만 남았다. 내부자들 속 주인공처럼 어쩌면 그는 ‘그게 뭐 어쨌다고’ 식의 뻔뻔함으로 나올 수도 있고 ‘그러거나 말거나 난 요즘 최고인데’ 라며 으스댈지도 모른다. 쌓였던 스트레스를 무차별 폭행으로 풀고 났더니 속이 다 개운하다면서.     


피해자는 오늘도 응어리진 가슴을 치며 잠이 든다. 그 날 그 자식만 아니었더라면 나 이렇게 살고 있지 않을 텐데. 네가 그따위로 살고도 행복할 것 같아!라고 소리치면서 동시에, 마음 한편에 들리는 얄미운 속삭임, ‘행복하면 어쩔 건데’라는 주인 없는 말에는 치를 떤다. 정말로, 그 파렴치한이 누군가의 삶을 철저히 짓밟고도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그야말로 어찌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피해자를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만약 당신이 그런 이해할 수 없는 폭력의 희생자라면 도대체 스스로를 어떻게 일으킬 수 있겠는가.

 

해결될 수 없는 폭력이 이 땅에는, 이 세대에는 너무 많다.

상식은 죽었다. 도덕도, 윤리도, 양심도, 모두 죽었다. 믿고 기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 각자의 작은 두 손바닥뿐이다.


고로 부지런히 긍정의 나무를 깎아 울타리를 만들고,

나를 믿어주는 한 두 명의 사람을 지키기 위한 테두리를 치자.

미래를 낙관하는 마음의 크기만큼 최대한 넓게 치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이 어떤 폭력으로 그 안에 구덩이를 파더라도,

땅이 너무 넓어서 저게 구덩이인지 우물 인지도 모를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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