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사람의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결심이 놀라운 2018년을 만들었는데.
우리 모두가 마음 속에 어떻게든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편리하게, 사이좋게, 부유하게, 똑똑하게 만들겠다는 소망 하나씩 품고 산다면
도대체 우리네 삶이 얼마나 위대해질까.
나는 답답하다.
우리는 우리가 왜 살아야하는 지를 반드시 알아야한다. 그저 100억을 벌기위해, 그저 집을 사기 위해, 그저 외제차를 끌기 위해 그저 임원이나 사장이 되기 위해 살아가기에는 우리 하나하나가 모두, 몹시 대단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마다 하나의 비전을 품는 일에 대해 말하면 사람들의 표정은 아리송하다, 혹은 돈키호테를 보는 표정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거나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건 비현실적이야 거나 둘 중 하나다.
불가능을 말하게 하는 원인은 대개 가난함에 있다. 돈의 가난이 아니라 마음의 가난이다.
일단 내 눈 앞의 상황이 팍팍한데 무엇을 꿈꾸고, 누구를 돕고, 사회 어떤 현상을 두고 눈물을 흘린단 말이야, 하는 외침에 나는 매우 공감한다. 내가 배고파 죽겠는데 어떻게 옆사람의 꼬르륵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겠는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알지만 그럼에도 고통 앞에서 모른척 고개를 돌리지 않는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내 시간이 중요하면 그의 시간도 중요하고 내 돈이 소중하면 그의 돈도 소중한 것이다, 세상에, 이런 것들은 우리가 이미 도덕시간에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배운 것들 아닌가. 약한 사람을 돕고 딱한 사정에 있는 사람을 배려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왜들 그렇게 나,나,나 자신밖에 모르는 것인가?
똑같이 막히는 고속도로에서 10cm의 기다림이 그렇게 어려운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지, 배부른 임산부를 세워두고 핑크의자에 앉아있는 배불뚝한 뻔뻔함은 어디서 오는지.
나는 그 원인이 우리의 끝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본다. 길어야 백년. 최선을 다해 남을 짓밟고 누군가의 눈물을 외면한 끝이 무엇인지 몰라서.
외로워 웅크린 사람을 향해 '나보고 어떡하라고' 답하면서 바쁘게 살아간 끝이 고작 죽음뿐이라는 것을 몰라서.
나는 가끔 뉴욕의 버스 안에서 보았던 아주 짧은 장면을 떠올린다. 휠체어를 끌고가던 할머니가 넘어졌다. 다이소같은 쇼핑몰 앞이었고 사람이 많았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할머니가 넘어지는 순간,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나는 내가 뉴욕의 출근길에서 쓰러져 피를 한 바가지 쏟았던 아침을 떠올린다. 엠뷸런스 다섯대와 경찰차 일곱대가 출동했었다고 - 했다. 적어도 12명의 사람이 일면식없는 동양인 여자애를 위해 바쁜 출근길을 멈추고 신고를 했으리라.
복잡한 9호선 지하철에서 가끔 상상한다. 누군가 여기서 질식할 것 같다고 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른다면 우리는 화를 낼까, 걱정할까.
사람, 서로 기대어 서고 있는 두 개의 모양새.
함께와 뗄레야 뗄 수가 없는 존재인 우리가 왜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채로 살아야 하나.
더 유명한 사람과 덜 유명한 사람으로 계급을 나누는 클라이언트를 보며,
'그렇구나. 그런데 행복하세요?' 묻고 싶은 오늘이었다.
행복.
돈의 적고 많음에 따라 그것이 결정된다면
명예의 있고 없음에 따라 당신의 행복함이 결정된다면
좋아요수와 댓글에 따라 당신의 컨디션이 결정된다면, 나는 정말로 슬플 것 같다.
그 말은 당신의 삶이 당신을 제외한 모두에게 달려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요소들이 나의 밖에 있다는 것 - 상상만해도 불안하지 않은가?
흔히들 소원이 뭐야, 라고 물으면 로또에 당첨되는 것이라고 답한다. 로또에 당첨되면 뭐할건데, 라고 물으면 하고 싶은 걸 할거라고 한다. 뭘 하고 싶냐고 하면 빌딩도 사고 차도 사고 놀러다니고 싶다고 한다. 왜, 그러고 싶은데, 라고 하면 우물쭈물하다가 그냥. 좋으니까. 행복할 것 같아, 라고 한다.
빌딩이 있으면, 또 좋은 차가 있으면 물론 좋을 것이다. 하지만, 빌딩이 있어야 '만' 행복하다, 차가 해외에서 만들어진 것이어야'만' 행복하다, 가 되는 순간 우리의 매일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힘들게 악착같이 살다가, 다 늙어서 이제 좀 행복해보려하면 죽는 것이다. 혹은, 어차피 틀린 인생 그래도 죽을 수는 없으니 겨우 겨우 살다가, 그마저도 벅차면 술 좀 진탕 먹고 노래 좀 크게 부르고 여기 저기 넘어지고 뒹굴고 후회하고 아, 그래도 이러고 나니까 좀 풀리네 하며 숙취 속에서 출근하거나. 그런 것이다.
그 굴레가 지긋지긋하다고 하면서도 끊어내지 못하고 막상 박차고 나오자니 두렵고 두려워하는 스스로는 혐오스럽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벼락출세한 신문 속 누군가들을 부러워 하고 연봉 순위를 곁눈질하다가 나는 언제 저렇게 되보나 이미 틀렸지, 시무룩해한다.
찌질하다.
그렇지 않은가?
나는 그랬다. 나는 그러했던 내 스스로가 너무 찌질하고 불쌍해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퇴사를 하고 6개월. 나는 여전히 때로 늦잠을 자고, 아직 올해 하기로 마음먹었던 것들 중 몇 개는 시작도 못했고, 누군가를 부러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나를 불쌍해하지 않는다. 언제건 나의 때가 오겠지. 이렇게 한 발 한 발 걸어가다보면 조금 늦을지언정 목표에 다다를 것을 안다. 그리고 그 길을 걷고있는 한, 나는 불행하지 않다. 나는 불행과 행복을 가르는 경계가 오직 하나, 행동하고 있는가, 라는 것을 배웠다. 행동하는 한, 좀 돌아가고 넘어질지라도 실패하지 않는다.
세상은 정말 넓고 기회는 수도 없이 많으며 100세 시대인 오늘날 우리는 말도 못하게 젊다. 나는 우리가, 우리 사람이라는 존재가 찌질한 틀에 갇히기에는 너무나 많은 가능성과 능력을 가진 생명체라는 것을 매일 느낀다. 왜 늦잠을 자면서 불평을 하고, 왜 두려워하면서 행동하기를 미루고, 왜 결정을 미루고 왜 질투를 하는가? 왜 이 짧은 실패에 무너져내리고, 왜 이 잠깐의 고통에 포기해버리는가? 한 번의 실수가 다시 이겨낼 수 없을만큼 크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런데 그 거짓말이 여기, 이 곳에는 너무나 많다.
나는 자살율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리다.
10년 째 23%를 기점으로 오락가락하는 이 경이로운 수치앞에서 미칠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 나 하나만은 아니리라고 믿는다.
누가 우리의 존재를 스스로 끊어내도 될만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었는가?
무언가를 해야한다. 우리 모두가 무언가를 해야한다. 그냥 좀 더 자고, 그냥 좀 더 눕고, 그냥 좀 더 놀며 보내기에는 당신의 잠재력이 너무나 크고 놀랍다. 나는 위대하고 뛰어난 당신의 비전을 기대한다. 반드시 세상을 바꿀 것이고 반드시 세상을 더 행복하게 만들 당신을, 나는 손꼽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