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원 한 장도 예민한데 만원도 아니고 10만 원이, 저 멀리 영국에서 긁혔다는 것에 어안이 벙벙했다. 심장이 100km 속도로 폭주하고 도대체 무슨 일이지 호흡이 가빠진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에어비앤비에 한 번, 카드사에 한 번, 또다시 에어비앤비에 한 번 전화를 걸었다. 세 통의 전화를 통해 알게 된 세 가지.
1. 이 결제건은 영국 현지에서 현지 시간 기준 오전 9시에 사용되었다.
2. 지인이나 가족이 내 카드를 한 번이라도 등록해서 사용한 적이 있다면, 등록한 기록에 의해 추후 사용 시 결제가 될 수 있다.
3. 도용으로 인한 결제라면 에어비앤비 측에서 환불해줄 수 있지만 혹여, 지인이나 가족의 계정에 내 카드가 등록되어 있어 발생한 것이라면 환불은 어렵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본에 있는 동생에게 물어봤다.
10분도 채 안되어 도착한 그녀의 대답은 [나 아닌데].
우선 카드를 정지했고, 에어비앤비를 통해 신고 접수도 했으니 컴퓨터가 사건의 전말을 밝혀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뇌는 얌전히 기다리질 못하고 날을 세워 이게 뭐야, 뭐라도 생각해봐 질문을 해댄다.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한 장면.
작년 초에 매우 가깝게 지내던 친구의 에어비앤비 계정에 내 카드를 등록했던 것 같은데.
심장이 철렁해지는 그 순간, 더 아찔한 질문은.
‘그 친구 하나뿐이었나?’
… 아닌 것 같은데.
어쩌면 몇 명 더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족이 아닌 사람의 에어비앤비 계정에 내 카드를 등록한 적이 ‘절대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게 원통했다. 개인정보 중에서도 보안을 철저히 지켜야 하는 ‘카드 정보’를 나는 참 헤프게 다뤘구나.
재벌집 딸도 아니면서 왜 그랬지? (재벌집 딸도 그러면 안된다.)
그 당시 나는 그 사람을 ‘매우 많이’ 신뢰했던 것이다.
우리 사이에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어, 라는 ‘과신’이 주변 사람들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줘도 상관없다는 사고관을 만들었다. 그 몹쓸 놈의 생각 공식 때문에 일어난 말 못 할 사연들이 한 트럭이다. 순진보다는 멍청에 가까운 판단 때문에 생겨난 문제의 파편을 거의 다 주워 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몇 조각이 남아 굴러다니나 보다.
박웅현은 ‘책은 도끼다’에서 말했다.
[ 삶은 실수할 적마다 패를 하나씩 빼앗기는 놀이다. ]
실수는 필수 불가결하지만, 반복할수록 기회를 뺏기거나, 자원을 잃거나, 손해를 본다. 나의 실수가 그 사람을 믿었던 것이라고 하지는 않겠다, 그 사람은 나에게 충분히 신의를 다했고 그 날의 우리는 참 돈독했으니까.
나의 실수는 타인에 대한 판단, 그 자체에 있다.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한결같이 나쁘거나 착한 사람은 없다. 한없이 온화한 사람도 궁지에 몰리면 거짓말을 할 수 있고, 파렴치한도 걸인의 두 손에 짜장면 값을 떨어뜨릴 수 있다. 지금 죽고 못 사는 그 사람이 언제라도 나에게 칼을 꽂을 수 있고, 반대로 지금 치가 떨리게 미운 원수와 형님 동생 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절대로’라는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
서로 믿을수록 안전거리가 필요하다. 지금의 우리는 불행이나 불신 따위가 틈탈 일없이 완벽해 보이지만 미래의 너는, 또 나는 어떠할지 모르니 말이다. 화이트데이에 영국에서 누군지도 모를 사람이 사용한 10만 원을 대신 지불해야 하는 나와 같은 상황이 ‘결코’ 발생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사람이 악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어떤 특성들이 – 카드 정보를 다시 본인의 것으로 바꾸기 귀찮다거나, 어떻게 찾아내겠어 괜찮을 거야 하는 무심함이라거나 – 졸지에 나쁜 사람을 만든다.
처음에는 발 동동 구르면서 화가 났는데, 이제는 또 꺼진 촛불처럼 덤덤하다.
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도용을 당한 거라고 해도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니, 중요한 정보를 제대로 간수 못한 내가 화끈하게 정신 차리는 비용으로 10만 원이면 감사하다고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