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성씨 Dec 13. 2023

울렁이는, 너는

낯선 곳에 스미는 한 해의 기록



말을 몰라도 꿈을 꾸지만, 상상 속 세상이 밖으로 나오려면 짧고, 길고, 연결된 단어들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내 생각과 가장 비슷한 놈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써도. 도무지 헤아릴 수 없어 차라리 입을 닫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루, 몇 주, 여러 계절이 지나면, 다채롭던 심상들이 차차 빛바라는 것을 나도, 당신도 느낍니다. 엄마, 아빠 밖에 몰라도 크레용 북북 긁어 두툼한 하트를 그려내던 꼬마의 열심도 없고. 사랑부터 증오까지 아흔 여덟 개의 단어를 알아도 떠나는 사람의 심금을 울릴 줄 모르니. 이 삭막한 삶을 어쩌면 좋을까요.


 내가 다시 여덟 살 어린 아이가 되어 받아쓰기를 한다면, 신호등, 넥타이, 전철, 바구니 따위보다는 포근함, 정다운, 온화한 같은 것들을 열심히 쓰다가. 그리고, 또 무엇으로 이 널뛰는 마음을 나타낼 수 있느냐고 묻겠습니다. 길을 걷다 마주친 아주머니가 싱긋 웃어주었을 때 붉어져오는 뺨을, 꼭꼭 눌러 포장한 선물을 받은 친구의 입모양이 우,에서 와로 바뀔 때 사르르 떨리는 뱃속을, 잠든 아빠의 손을 잡으면 전해오는 뭉근한 온기를. 어떻게 하면 파도 같고, 바람 같고, 영화의 마지막 노랫가락 같은 기분을 꺼낼 수 있는 지를. 나는 여전히 묻고 싶습니다.


 산다는 것은 참 재밌는 일입니다.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를 이렇게 저렇게 떼어 쓰고 다시 붙이던 소녀가 직장인이 되고, 사장님이 되고, 아내와 며느리가 됩니다. 엄마, 옆에 줄 짓는 말들이 ‘좋아’, ‘사랑해’, ‘고마워’ 에서 ‘미워’, ‘귀찮아’, ‘싫어’가 되었다가 그저 죄송하고, 그립고, 뭉클해지는 것이 다, 시간이 하는 일 아니겠어요. 듣고, 보고, 만지고, 맡은 오늘이 내 속 어딘가서 소화되어 단어를 지나 문장이 됩니다. ‘즐거운 가족여행이었다.’ 처럼, ‘푸근한 토닥임 덕분에 괜찮았다.’ 처럼. 일기쓰기가 오랜 숙제였던 이유는 세상을 꼭꼭 씹어 종이 위에 되새기는 연습이었던 지 모릅니다.


 당신은 누군가의 글 속에서 비로소 정확히 표현된 내 감정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그럴 때면 밑줄을 치고, 사진을 찍고, 가까운 사람에게 ‘어머, 이거 내가 쓴 거야?’ 라며, 공감을 표합니다. 내 생각은 나만의 것인데, 어떻게 다른 이가 그 일렁이는 잔상을 써 내릴 수 있었을까, 오래 궁금했습니다. 심지어 그녀는 바다 건너 다른 나라에 사는데. 분명 우리는 언어도 다른데. 시간이 흘러 깨닫는 몇 가지는 문화와 시대가 달라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싸우고, 껴안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울고 웃음이 어떻든 말 위에 아롱진다는 것입니다. 


 이번 해는 나에게 참 복잡합니다. 어렵고, 외롭고, 설레고, 감사합니다. 엄청나게 넓고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압축적으로 느낀 것은 생의 두 번째인데, 처음은 스물 셋 뉴욕이었고 다음은 서른 셋의 천안이네요. 꼭 10년만입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말도 같고 새로 생긴 가족도 있지만,서도. 생소한 동네 이름,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늦게 달리는 버스, 어색한 골목이며 서먹한 공기와 친해지기 위해 나는 참으로 열심히 걸었습니다. 낮에도, 저녁에도, 어느 날은 아주 늦은 밤에도. 반짝이는 네온 사인 아래에, 위에, 가로등을 지나고 카페에 앉으면서 조금씩, 스며듭니다.


 내 동생은 일본어를 아주 잘 하는데 그 건 아마도 남자친구가 그 곳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운 문화를 배우는 데 가장 빠르고, 또 정확한 것은 사람을 사귀는 것이라죠. 문화동, 이라고 발음하면 그려지는 그 언저리의 풍경과 골목들이 조금은 친숙합니다. 노을이 멋진 저녁에는 절로 타운홀과 성성호수공원이 떠오르고요. 곳곳마다 함께 갔던 사람, 그 날 우리의 주제, 웃음 뒤에 느꼈던 생각들이 하나 둘 뒤따릅니다. 혼자, 또 같이 했던 대화들이 저를 따라 걸으며 하늘 아래 많이 편안하게 만든 것이 분명합니다. 


 이 글은 변화의 기록이고, 짧은 일기이고, 감정의 집합체입니다. 유려한 문체와 섬세한 에피소드로 사랑을 일깨워 준 바다 건너 그녀를 생각합니다. 이 일기는 투박하고 어떤 의미에서 불친절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삶에 위로가, 혹은 응원이, 어떠한 쪽이든 당신의 마음에 괜찮은 물둘레가 되기를 바랍니다. 밑줄 칠 만한 문장이 하나라도 있다면 기쁘겠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