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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씨 Dec 14. 2023

안녕하세요,
천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명절에 움직이는 건 훨씬 비쌉니다. 것도, 하필 설날.”


견적을 보러 오시는 분들마다 하나같이 고개를 내저었다. 

확실히 난이도가 매우 높은 이사였다. 옮겨야 하는 기계가 세 대. 게다가 두 대는 새로 들어갈 곳의 출입문과 엘리베이터가 좁아, 분해가 필요했다. 전문 분야의 베태랑을 모셔야 겨우 가능한 일이다.


 사무실을 천안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포장이사, 레이저 커팅기 분해조립이 가능한 곳, UV 프린터 전문 업체 이렇게 3곳이 힘을 합쳐야 했다. 한 달 전부터 전국 팔도를 뒤져 찾은 끝에, 겨우 이사팀을 꾸렸다. 

이제 3년간 일궈 온 모든 것들을 이고 지고 새로운 터전으로 떠날 일만 남았다.


아침 일찍 마곡과 방화에서 각각 짐을 옮기고 이사 트럭이 ‘내일 아침에 천안에서 뵙겠습니다’ 하며 시원하게 출발한 후 - 싹 비워진 사무실에 레이저 전문가 2분이 도착했다. 처음 이사 오던 날처럼 텅 빈 백색 공간에서 속절없이 해체되는 레이저 커팅기를 보며 감상에 젖을 틈도, 없이. 바닥과 벽면에 묻은 물감들을 지우고 거울을 붙였다 뗐다 하며 생긴 자국들을 가리느라 정신이 없다. 천안까지 꽉 막힌 귀성길이 눈에 선해 1시 전 출발을 목표로 준비했건만 출발한 시간은 오후 2시, 30분. 레이저 전문가분들은 ‘도착하면 5시가 넘겠다’며 부리나케 떠나셨고. 나 역시 가양동 집에서 챙긴 짐들로 미어터지는 차에 올라 천안까지 장거리 운전을 시작했다. 짐을 좀 더 정리하고 챙기느라 지체된 탓인지 도착 예정시간은 6시가 넘는다. 조급증이 일었다.


평생. 어쩌면 그 가까운 시간을 살아온 서울을 떠난다는 게, 아무래도 익숙지 않다. 그 아쉬움을 안다는 듯 꽉 막힌 서부간선도로는 10분에 1km도 보내주지 않았다. 먼저 떠난 전문가 분들의 문을 열어드리지 못한다는 걱정에 식은땀도 났지만 1시간 후, 서울의 반도 통과하지 못하자 도리어 마음이 가라앉는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나 대신 레이저 커팅기를 잘 부탁한다, 당부하고 전문가분들께도 길이 이 모양이라 도저히 문을 열어드릴 수 없겠으니 남편과 먼저 설치를 시작하시라 요청하고 나니, 

이제 남은 건 긴 시간 뿐이다.

 

네비게이션은 아직도 3시간, 20분, 아니 30분. 아무튼 갈 길이 멀다고 - 빨갛고 긴 선을 보여준다. 

그러고보니 무려 3시간이나 온전히 생각에만 집중한 적이 있던가? 브레이크에 발을 올렸다, 떼고. 다시 올렸다, 떼면서 생각한다. 최소한 2022년은 정말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 엄청난 변화의 시발점에서 무려 3시간이나 오롯이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감사한 일이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 또 결혼 후 반 년, 주말 부부를 하면서. 벌써 1년 넘게 매주 오간 천안이라 익숙하기도 하지만. 하루 이틀 자고 오던 것과 생활의 터전이 되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다. 그게 도대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조금도 감을 잡을 수 없다.

 

서울을 가까스로 빠져나가자, 출발 때 말갛던 햇빛은 서서히 누렇게 물들고 있다. 

영원히 올 것 같지 않았던 하루가 이렇게 저물어 간다는 게 어색하고, 낯설어서. 

푸른 숲 위로 드리워진 겨울 오후를 가만히 바라본다.  

나무들은 점점 많아지고 높은 건물이 줄어드는 것을, 

익숙한 동네가 멀어지고 생경한 지명이 이어지는 것을,

인류 발전의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것 같은 풍경이

차창밖으로 느릿느릿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나는 나아가면서, 동시에. 분리되고 있구나.

공기처럼 당연했던 것들이 모두 멀어져간다.

엄마. 아빠. 동생. 친구. 단골 카페, 와인샵, 자주 가던 도서관. 책방. 골목, 버스정류장. 

벌써부터 그리워지는 무수한 감촉, 소리와 냄새들.

괜시리 운전대를 부여잡는다.

 

친구들은 차 한 잔, 술 한 잔을 나누면서 이구동성 말했다. 

‘근데 진짜 걱정이 하나도 안 돼.

어디서든 잘 살건데. 친구도 금방 많이 만들거고.’

나 역시 까르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렇겠지.

 

새로운 행복이 상실을 온전히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은, 무수한 이별에서 배웠다. 

뉴 페이스에게 설레는 마음이 남이 되어버린 당신에 대한 애잔함을 상쇄해주지는 않는다.

그저 조금 더 강한 감정이 그 날의 기분을 좌우할 뿐.

 

생각해보면 이런 큰 변화가 처음은 아니다. 물론, 마지막도 아닐터다. 

꿈에 그리던 학교의 학생이 되었을 때. 

따끈한 사원증을 목에 걸고 회사 계단을 올랐을 때. 

웨딩 드레스를 입고 남편의 손을 잡았을 때. 

그 때도 지금처럼 도대체 무슨 일이 펼쳐질 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비교대상이 없는 새로운 세상 아닌가.

 

그러니까, 지금 이 불안과, 기대와, 기쁨과, 슬픔과. 희망과, 걱정이 한껏 뒤섞인 이 기분은, 

출발선에 선 모두에게 당연한 것이다. 다만, 나이가 먹은 만큼 익숙해진 것들이 많아져서.

그래서 더 아쉬운 것뿐이다. 

휴지를 꺼내 얼굴을 닦았다.

 

평택에 들어설 때 쯤 전화벨이 울린다. 남편이다.

어디쯤이야’, 묻고 평택이라고 답하자 ‘거의 다 왔네’, 하더니 설치를 시작했다고, 

천천히 조심해서 오라고 한다.

‘얼마나 남았어’, 라기에 이제 1시간, 근데 시간이 계속 늘어나. 라고 하자 남편은 말했다.

그래, 괜찮아. 걱정 하지마.’

 

전화가 끊기고, 다시 차 안은 조용해진다. 고요한 운전석에 앉아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는다.

어릴 때. 아주 간절히 바라던 몇 가지가 있었는데. 대부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별 게 아닌 게 되거나, 

이루고 나면 또 다른 소원을 만들어내는데 반해. 

바뀌지 않는 것 하나가 사람이었다. 마음 놓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내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 사람.

 

나는 모든 것이 다 변해도 괜찮은 이유를 향해 가는 것이다. 

외로울 까봐, 좋은 팀원들을 만나지 못할 까봐, 이 고생을 해서 옮긴 사무실이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할 까봐 초조한 마음을, 나눌 사람이 거기 있다.

그러니까 괜찮아. 걱정할 필요가 없어.

 

한층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브레이크에서 엑셀로 발을 옮긴다. 도로도 한산해졌다. 종일 20km를 넘어설 줄 모르던 계기판이 60, 80으로 올라간다.

해는 까무룩하게 져버렸다.

깜깜해진 수평선 위로 붉게 타오르는 마지막 태양을 볼 때쯤, 표지판 하나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천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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