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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일정을 베로나에서

이탈리아 여행 509

by 배심온

90일간의 여행 마지막 일정으로 베로나에 왔다. 6년 전 동료를 따라다니던 도시를 이번에는 내가 길안내를 맡는다. 아침 일찍 도착하여 아직 청소 중인 숙소에 짐만 맡겨놓고, 점심 식사를 먼저 하고 거리로 나선다. 6년 전 머물던 숙소와는 거리가 있지만, 다니다 보니 어디쯤인지 알 것 같다.

먼저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인 빅토리아 임마누엘 2세의 동상이 있는 브라 광장으로 향한다. 가리발디 동상도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다. 베로나는 유독 인도가 넓고, 박석이 아닌 통돌이 깔려있는데 그 크기가 성당에서 보던 묘의 크기만 한 것 같다. 브라광장은 아레나를 끼고 있고,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북적이며 활기차다. 나는 6년 전에 베로나 아레나 내부를 둘러보았고, 일행들도 콜로세움을 보고 온 터라 들어갈 생각은 안 한다. 2만 명을 수용할 정도로 규모도 크고 보전상태도 꽤 좋다. 베로나 아레나는 6월 말부터 8월 말까지 열리는 오페라 공연으로 유명한데, 그때는 베로나 숙소가 동이 난다고 한다. 일정이 맞지 않아 아레나에서의 오페라 감상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아레나에 울려 퍼지는 한여름 밤의 오페라를 상상해 본다. 장소가 주는 힘이 클 것 같다. 한번 보고 싶다. 광장에서 이어지는 길들은 명품거리인 듯, 익숙한 옷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겨울에는 50% 세일을 해서 가게를 기웃거렸었는데, 5월 중 세일은 없나 보다. 내가 오월에 이렇게 여행을 다닌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난다. 명품 거리를 빠져나오면 줄리엣의 집이 바로 나온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어서 금방 알아챈다. 줄리엣 동상이 있는 마당까지는 무료라서 우리도 줄을 섰다가 들어가는데, 휙 돌아 나오는데 채 오분도 안 걸린다. 줄리엣의 가슴은 사람들의 손을 타서 하얗게 반들거리는데, 불편한 마음이 든다. 줄리엣의 가슴에 손을 얹고 사진을 찍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 때문인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다들 그렇게 한다. 6년 전 나도 그녀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사진을 찍었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는다. 도시는 크지 않아서 광장과 광장이 이어지는 느낌이다. 과거 약초시장이었다가 지금은 집회장소로 활용되기도 한다는 에르베 광장은 기념품 파는 가판대가 점령하고 있다. 중세 건물인 람베르티 탑도 보인다. 마돈나 분수의 마돈나는 손에 수갑을 들고 있고, 시뇨라 광장으로 나가는 작은 아치 위에는 코끼리의 상아가 매달려있다. 죄 없는 자가 지나가면 그것이 내려온다고 하는데, 그런 일은 없다고 하니 모두들 약간의 죄는 짓고 사나 보다. 이곳에 이런 조형물이 있는 까닭은 여기가 과거 죄지은 자들을 처형했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광장을 향하고 있는 오래된 건물 벽에는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는데, 옛날 그대로일 것 같지는 않다. 야외에서 성하게 남아있기는 어려우니 현대인들이 덛칠을 했을 거라 생각된다. 람베르티 탑 앞에는 작은 광장에 단테의 동상이 있는데, 그의 탄생 6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단테가 피렌체에서 쫓겨나 이곳 베로나에서 잠시 살았던 인연을 기억하는 것으로 이 작은 공간을 시뇨라 광장이라고 한다. 베키오 다리도 그렇고 시뇨라 광장도 그렇고 피렌체와 동일한 이름을 불이는 걸 보면, 베로나에게 피렌체는 동경의 대상이었을까?

베로나의 강, 아디제 강으로 나와서 피에트라 다리를 건너 푸니쿨라를 타고 피에트라성 위로 오른다. 푸니쿨라는 왕복은 3유로, 편도는 2유로인데, 내려오는 길이 예쁘다고 하여 올라가는 것만 이용한다. 오전에 내린 비로 아디제 강은 불어있고, 유속이 빨라서 학생들이 카약을 즐길 정도다. 성 위에서는 베로나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고, 경치는 무척이나 아름답다. 비가 온 후라 그런지 도시는 씻어놓은 듯 화사하고, 구름은 드높다. 일행 중 한 분은 베로나를 가장 기억나는 도시 중 하나로 꼽는다. 우리는 성벽 위에 올라앉아 햇살을 맞으며 망중한을 즐긴다. 버스킹 하는 아저씨의 모자에는 작은 동전 몇 개뿐이다. 동전 하나를 더한다. 성을 내려오면서 맛있는 젤라토 집을 찾는다. 천사가 젤리또를 먹고 있는 로고의 가게로 들어간다. 천사도 먹을 만큼 맛있다는 거 아니겠는가. 실제로 여태 먹어본 젤라토 중에서 최고의 맛이다. 슬슬 걸어서 보르사리 문으로 간다. 1세기에 세금을 걷기 위해 만들어진 문이라고 하는데, 크지는 않지만 2천 년을 견뎌낸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다. 양쪽의 현대식 건물을 이어 도로로 진입하는 관문 역할을 하는 하얀색 아치모양의 문이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베로나에서의 이튿날, 베키오 다리를 걷고, 카페 보르사리에서 크로와상과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1969년에 문을 연 카페라고 하는데, 작은 테이블 세 개가 전부인 좁은 공간이지만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예쁜 커피잔들이 진열되어 있어서 정감 있고 커피 맛도 아주 좋다. 비가 와서 그런지 어제와는 달리 도시가 텅 빈 느낌이다. 우산을 쓰고, 아주 천천히 베로나 대성당과 성 아나스타샤 성당을 둘러보고 점심식사를 하러 간다. 넓은 정원이 있어서 레스토랑 같은 분위기에, 화덕에서 막 구운 피자가 짜지 않고 우리 입맛에 잘 맞는다. 맥주 한 잔씩 곁들여 피자 세 판을 맛있게 먹는다. 오늘은 내가 일행에게 식사 대접을 한다. 여행 준비로 애쓴 대장에게 보내는 감사 인사이고, 오늘이 나의 생일이기 때문이다.

베로나 여행은 생각보다 훨씬 여유 있고 즐겁다. 숙소가 깨끗하고 편안해서 더욱 그렇다. 우리는 서울에 돌아가서 만날 날자를 정하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이제 집에 갈 일만 남았다.


2025. 5. 9. 01: 30

카타르 도하 공항에서

카페 보르사리와 보르사리 문

베로나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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