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는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내가 서른 살이 넘을 때까지 월화수목금토, 또는 월화수목금토일 전부 출근하실 때도 많았다. 직군을 화이트칼라, 블루칼라로 분류한다면 우리 아버지는 완전한 블루칼라의 직장인이었다. 어릴 때는 아버지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잘 몰랐는데 고등학생 무렵 가슴팍에 화상을 입은 아버지께 왜 다치셨냐고 여쭤보니 용접을 하다가 잘못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연고를 발라드리며 너무나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
교대를 졸업해서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추운 겨울에 따뜻한 히터가 나오는 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창밖에 눈이 오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아빠 생각이 많이 났다. 아빠가 히터도 없고 지붕만 있는 작업실에서 일하신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 이렇게 눈이 오는데 밖에서 일하는 우리 아빠는 얼마나 추우실까. 아빠는 그렇게 추운 곳에서 일하시는데 딸인 내가 따뜻한 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죄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런 아버지께서 몇 해 전 퇴직을 하셨다. 나는 아빠가 더 이상 혹한기와 혹서기에 밖에서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너무나 안심이 되고 좋았으나 아버지께서는 한동안 무기력하고 힘들어하시는 것 같았다. 매일 동이 트는 이른 시간에 집을 나가 어둑해지면 들어오시다가 갑자기 한정없는 시간이 주어졌으니 그 허무함 때문이실까 걱정이 되었다.
아빠는 가끔 전 직장에서 일이 바빠 도와달라는 부름이 있으면 나가서 도와주실 때도 있으시지만 일이 없을 때에는 온종일 집에 계신다.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소파에서 보시다가, 주무시다가, 컴퓨터로 스포츠 만화를 보시다가.. 그러다 몸이 너무 찌뿌둥하면 버스를 타고 가까운 산 앞에 있는 정류장에 내려 등산을 다녀오신다.
아빠 곁에 매사에 긍정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엄마가 없었으면 아빠의 삶은 정말 단조롭고 외로웠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아빠와 달리 성격이 굉장히 활달하시고, 가고 싶은 곳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분이라 주말에 같이 쉴 때면 아빠를 조수석에 태우고 당신이 직접 운전해서 산으로, 들로, 바다로 나가 콧바람을 쐬고 오셨다. 아빠한테는 정말로, 엄마가 있어서 다행이다.
얼마 전, 아버지를 내 차로 모시고 이동해야 했던 순간이 있었는데 나는 아버지를 차에 태워드리기 전에 미리 차 안에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 엘비스프레슬리의 곡 'Can't help falling in love' 노래를 틀어놓았다. 그런데 조수석에 타신 아버지께서는 잔잔한 노래를 가만히 들으며 앉아계실 뿐 그날따라 뭔가 더 기운이 없어 보이셨다. 나는 아버지의 기분을 낫게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아부지, 나는 5일 근무하고 이틀 쉬어도 진짜 피곤할 때가 많은데 아부지는 예전에 어떻게 주말까지 일하셨는지 모르겠어요. 나이 먹을수록 아부지가 진짜 대단하다고 느껴져요. 아부지께서 우리 삼남매에게 물려주신 가장 큰 가치는 '성실'인 것 같아요."
그러자 아버지로부터 뜻밖의 답변이 돌아왔다.
"아니야. 요즘 생각하면.. 아부지가 너희를 잘못 키운 것 같어. 너무 착하고 성실하면 사회에서 당하고 살기 좋은데 아부지는 너희한테 항상 착하게 살아라, 성실하게 살아야 된다 이렇게만 가르친 것 같어.. 아부지가 그렇게 살아보니까 약아빠진 사람들이 더 잘살기만 하더라. 세상은 좀 약게 살아야 돼. 너무 착하면 안 돼."
사기치고 남을 등쳐먹어도 경제적으로 잘만 사는 사람들을 보고 평생 성실하게만 살아온 아빠는 좌절감을 느끼신 걸까? 아니지, 아무리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도 성실과 정직, 웃으며 살자는 가훈으로 우리를 키운 부모님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아빠한테 이야기해드리고 싶었다.
"아부지, 그래도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지, 나는 아빠가 우리를 잘못 키웠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봐봐, 유재석 같은 사람도 착하고 성실하게 사니까 그 힘든 연예계에서도 큰 구설없이 최고의 자리를 지키면서 오래가잖아요. 인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지금 반짝 잘 살 수 있을진 몰라도 언젠간 탈이 나기 마련이에요. 그리고 우리 삼남매가 기본적으로 착하긴 하지만 그렇게 또 막 만만해 보이고 그런 캐릭터는 아니잖아~ 아빠도 알죠? 나 고집 엄청 세고 할 말은 하는 거. 오빠도 나도, 00(동생)도 얼마나 잘 컸어. 다 자기 밥 벌어먹고 살고 남한테 피해 안주고 자기 자리에서 잘 사는데. 아빠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안 그래요?"
강한 어조로 빠르게 몰아붙이면서 힘주어 말하는 나의 말에 아버지께서는 그건 그렇지 하고 피식, 웃으셨다. 아빠는 무조건 착하게 살아야 한다, 하고 키운 소중한 자식들이 이 험하고 거친 세상에서 당신이 겪었던 것처럼 상처받고 좌절할까 봐 걱정하시는 거였다.
이렇게 대화를 나눈 지 벌써 한 달은 지난 것 같은데 지금도 일상에서 운전하다가 문득, 아버지께서 하신 말이 기억이 나서 마음이 아플 때가 있다.
아빠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실까?
아빠의 마음이 침전될 때마다 옆에서 이 노래를 들려드리고 싶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올해 초, 내가 타지로 이사하던 날. 엄마와 함께 우리집 이사를 도와주시던 아부지 뒷모습. 저 패딩은 10여년 전 내가 취직하고 처음으로 사드린 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