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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 햇살 Feb 06. 2024

30대 후반, 내가 금수저였음을 알았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따뜻한 사랑의 가치

 "언니, 엄마가 이번 겨울에 가족들 다 같이 베트남 여행을 가자고 하시네. 돈은 엄마가 다 대신다면서.."


 작년 연말, 갑자기 걸려온 동생의 전화에 나는 깜짝 놀랐다. 코로나 이전부터 6년이 넘게 해외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던 나에게 해외여행을, 그것도 무려 가족여행을 가자고 하는 동생의 말에 한 번 놀라고, 돈을 엄마가 다 대주신다는 말에 두 번 놀랐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장성한 자식이 셋이나 되는데 60대인 엄마가 여행을 보내주신다니 죄송스럽기도 했다.


 "아니, 엄마가 무슨 돈이 있어서 해외여행을 지원해 주셔? 그것도 가족 다 같이 가는 비용이면 꽤 들 텐데.."


 "엄마가 몇 년 동안 적금을 들어서 천만 원을 모으셨대. 가족들 다 같이 해외여행을 가보고 싶다고.."


 입이 딱 벌어졌다. 엄마가 몇 년 동안 적금을 부어서 가족여행을 위해 천만 원을 따로 모아놓으신 것도, 그 돈을 가족을 위해 한 번에 쓸 생각을 하신 것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는 돈 십만 원을 쓰는 것도 벌벌 떠는데 십만 원도, 백만 원도 아닌, 무려 천만 원이라니!




 


 우리 부모님은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주택에 사신다. 그 이유는 오롯이 자식들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막 입학할 무렵 우리 집은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24평의 임대아파트였지만 우리 다섯 식구는 참 행복했다. 어릴 때 아버지께서 금성 통신(지금의 LG)이라는 대기업을 다니시다가 구조 조정으로 회사를 나오게 되어 작은 아버지와 함께 동업을 하셨는데, 사업이 잘 안 되어 큰돈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집을 팔고 할머니 댁에 있는 방 한 칸에 다섯 식구가 옹기종기 얹혀살다가 부모님께서 맞벌이를 하시며 돈을 모아 이사를 나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24평의 아파트도 우리 가족에게는 궁궐 같았다.


 그곳에서 10년을 넘게 살다가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고 동생이 같은 고등학교에 1학년으로 입학하게 되자, 부모님께서는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와 가까운 주택으로 이사를 하기로 결정하셨다. 그 당시 오빠도 우리 자매가 다니는 고등학교와 멀지 않은 곳의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결정은 오롯이 자식들을 위한 것이었다. 학교와 집이 가까워지자 나는 이동 시간을 아껴 더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고, 좋은 성적으로 원하는 대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주택살이라는 것이 참 어려운 것이 겨울에는 수도관이 얼어서 터지고,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에어컨 없이 버티기가 너무 힘들었다. 아버지께서는 계절마다 집을 보수하시느라 부단히 애쓰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은 매년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그래도 부모님께서는 매년 추위와 더위로 씨름을 하시면서도 여전히 그 주택에 살고 계신다. 아파트로 이사하시는 건 어떤지 권유도 해보았지만 아버지께서는 평생 이곳에서 살 거라며 고집을 꺾지 않으신다. 아버지께서 몇 년 전 퇴직을 하시고 앞으로 노후 자금도 많이 들 텐데 되도록 지출을 삼가려고 하시는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 부모님께서 천만 원으로 해외여행을 보내주신다니! 우리 삼 남매가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자식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걷어서 같이 여행자금에 보탤테니 천만 원을 다 쓰지 마시고 2~300 정도만 쓰시라고도 말씀드려 봤지만 엄마는 완강하게 거절하셨다. 그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이렇게 모으지도 않았다고. 엄마 돈으로 자식들 해외여행 보내주고 싶은 게 엄마의 로망이니, 그냥 같이 가기만 해달라고...


 결국 엄마의 뜻을 받아 우리는 처음으로 가족 다 같이 베트남으로 해외여행을 갔다. 여행 계획과 이동수단 예약은 사위가 맡고, 동생이 비행기 티겟팅과 숙소 예약을 맡아주고, 오빠는 이동할 때마다 구글 지도로 맛집을 알아봐 주어서 나는 호텔에서 체크인과 체크 아웃을 할 때와 룸서비스를 신청할 때, 식당에서 주문할 때 영어로 말하는 역할만 맡으면 되었다.

 

3일 동안 누렸던 호화로운 호텔 뷔폐식 조식


 난생처음 저가항공이 아닌,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고 5성급 호텔에서 3박 4일을 묵으며 매일 호화로운 조식을 먹는 호사를 누렸다. 마사지샵에서 이틀 연속 정성스러운 마사지를 받으며 온몸의 피로를 풀고 가족들과 함께 하하 호호 웃으며 개별 풀장에서 수영을 즐겼다. 부모님께서는 손자, 손녀가 재롱을 떠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흐뭇한 미소를 띠셨다. 너무나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면서 여행을 오기 전 동생이 한 말이 생각났다.


 "언니, 우리가 언제 또 이렇게 가족들 다 같이 해외여행을 갈 수 있을까? 지금 나는 둘째를 임신해 있고, 내년에 출산하면 또 당분간은 여행을 가기가 힘들 테고.. 엄마, 아빠도 점점 나이가 드실 거고, 언니나 오빠도 각자의 삶을 살기 바쁜데 지금 아니면 이렇게 못 갈 것 같아. 엄마 덕분에 이런 기회가 생긴 게 나는 너무 감사해."


 4일 내내 우리 가족은 단 한 번의 다툼이나 기분 상할 일 하나 없이 서로를 배려하고 챙기면서 행복한 여행을 마쳤다. 그리고 제부가 인천공항에서 부모님 댁까지 함께 타고 올 수 있는 커다란 벤을 미리 예약해 준 덕분에 같이 편안하게 집까지 올 수 있었다. 부모님 댁에서 하루 자고 다음 날 집으로 돌아오려고 했던 나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깜짝 놀랐다. 밖의 공기와 거의 다를 바 없는 차가운 냉기가 집안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여행으로 4일 동안 집을 비워서 그렇다며 황급히 보일러를 켜러 주방으로 달려간 엄마는 너무 추우니 목욕은 내일 하고, 오늘은 대강 세수와 손발만 씻고 얼른 자라고 하셨다. 나는 화장실에서 덜덜 떨며 세수를 하고, 손발을 씻으면서 마치 동화 속에서 12시 종이 땡, 하고 울리자마자 마법이 풀린 신데렐라가 된 것 같아 쿡쿡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나온 순간. 방 안에서 "위이이잉~" 하고 울리는 큰 소리에 깜짝 놀라 방문을 열었을 , 나는 가슴이 쿵하는 충격과 함께 머릿속에 문장을 떠올렸다.


 '아. 내가 바로 말로만 듣던 금수저였구나...'


 엄마 아빠는 옛날에 내가 쓰던 방 침대 위에 두툼한 극세사 이불을 두 장 올린 것만으로도 모자라, 행여나 큰 딸과 손자가 감기에 걸릴까 봐 이불을 들어 올려 드라이기로 이불속에 따뜻한 바람을 불어넣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추우니까 얼른 이불속으로 들어 가. 엄마가 찜질팩에 따뜻한 물 넣어서 데워 왔으니까 이것도 꼭 끌어안고." 하면서 뜨끈한 찜질팩에 수건을 둘러 너무 뜨겁지 않도록 만들어 건네주셨다. 이불속은 너무나 따뜻했고, 찜질팩까지 안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눈을 감고 잠을 자려고 하는데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부모님께 너무 감사하고,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백만장자도, 억만장자도, 세상 그 어떤 부자도 부럽지가 않았다. 30대 후반이 된 지금에서야 나는 깨닫는다. 진정한 금수저는 돈 많은 부모를 둔 사람이 아니라, 따뜻하고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부모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은 금수저였다.


 

 그리고 내가 받은 이 사랑을 부모님께, 그리고 내 자식에게 베풀면서 '사랑'이라는 가장 중요한 가치를 최우선으로 두고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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