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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 햇살 Jan 05. 2024

미안한 말인데 이제 연락 안 했으면 좋겠어

아프고 무겁지만 그녀에게 전했다.

 2023년 12월.

 나는 올해 그녀의 생일을 챙겨줬는데 내 생일에 그녀가 연락하지 않는 것을 보고 씁쓸하면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제 그녀와의 19년간의 시간을 정리하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가 나의 생일을 축하해 준다면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는 말하기가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교실에서 만났다. 그녀는 작고 귀엽게 생긴 인상에 성격도 순하고 착했다. 고등학생 시절 나의 목표는 뚜렷했기 때문에 나는 공부에 열중했고,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는 교실을 나와 성적이 상위인 학생들을 따로 모아 관리하는 학급이 있는 건물로 이동하여 자습을 했다. 그녀는 가끔 나를 보러 건물 앞으로 오기도 했지만 그렇게 막역한 사이는 아니었다. 나는 나와 그녀의 공통점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고, 대화가 술술 이어지는 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같은 학급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그럭저럭 잘 지내는 같은 반 친구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인연이 계속 이어지게 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원하던 교대에 진학했고, 그녀도 같은 지역에 있는 사립대학에 갔다. 고등학생 때까지 공부에만 매진했던 범생이였던 나는 동아리 활동, 과외지도, 각종 MT 참여 등 대학교 생활을 즐기느라 1년을 바쁘게 보냈고 그녀에게 연락을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는 1년에 한두 번씩 꼭 나에게 연락해서 만날 약속을 잡았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나에게 연락해 주는 그녀가 고마워서 반갑게 그녀를 만났다.





 그런데 그녀를 만나고 집에 돌아올 때마다 왠지 이상하게 내 마음이 가볍지가 않았다. 왜지?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시간이 가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내 앞에 있는 친구'와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그녀는 늘 내 주변 사람의 근황이나 소식을 궁금해했다. 하물며 그녀와는 일면식도 없는 내 선배의 소식을 묻거나 내 가족들에 대한 근황을 물었다. 그냥 지나가면서 '가족들은 잘 지내지?'하고 묻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길 바랐다. 예를 들어 "오빠는 요즘 뭐하고 지내? 여자친구랑은 잘 지내? 오빠는 어디에 취업하고 싶으시대?" 이런 식으로 나에 대한 질문이 아닌 나의 가족이나 지인들이 어떻게 사는지 속속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거절이나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나는 거의 몇 년을 그대로 대답해 주었다. 속으로 '아, 얘가 힘들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졌나?'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나 스스로에 대해서 자존감이 떨어지고 힘들어지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는지 궁금해하고 질문하게 된다는 걸 대학생 시절 나도 경험했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그녀가 현재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이해하려고 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그녀의 대화 방식은 변하지 않았고 나는 결국 용기를 내 그녀에게 말했다.

 "00야, 나 너를 만나서 대화하면 약간 취조당하는 기분이야. 나는 '너와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그런데 너는 정작 네 이야기는 잘 하지 않으면서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만 계속 물어보니까 내가 기분이 좀 그랬어."

 그러자 그녀는 깜짝 놀란 눈치였다.

 "내가 그랬어? 몰랐네. 미안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물어보고 있는 줄은 몰랐어."

 빠르게 수긍하고 사과하는 그녀를 보면서 '그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지. 그녀는 그래도 마음이 참 순수하고 착한 친구지.'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그녀의 대화 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그건 그녀가 일부러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한 게 아니라, 그게 원래 그녀의 대화 습관이기 때문이었다.





 

 그 후 내가 이혼을 고민하게 되면서 마음이 너무 힘들어져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은 시기가 왔고, 나는 절친한 친구 몇 명을 제외하고는 연락을 하거나 잘 만나지 않게 되었다. 그때에도 그녀는 나에게 연락을 해서 만나자고 했지만 나는 내 상황이, 그리고 내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나중에 만나자고 이야기했다. 특히나 힘든 시기에 나에게 궁금한 것을 캐묻는 그녀의 대화 방식은 나에게 커다란 스트레스가 될 것 같았다. 그렇게 2~3년 정도 나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그녀가 결혼을 한다는 연락을 받고, 결혼식에 참석해서 오랜만에 그녀를 봤다.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고, 축의를 하고, 사진까지 찍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도 모르게 이것이 그녀와 나의 마지막 만남일 거라고 생각했다. 10년이 넘게 인연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녀의 연락이 있었기 때문이지, 내가 먼저 그녀를 찾은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와의 인연을 내 생각보다 더 길게 유지하게 되었다. 그녀가 결혼 후 힘든 일들을 겪고, 나에게 고민 상담을 하며 처음으로 '자기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련의 힘든 일들을 나에게 털어놓으면서 결혼 생활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고 했다. 그리고 이혼한 나에게 이혼하면 어떤지, 그 결정을 후회하진 않는지 하는 것들을 물어봤다. 나는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진심을 담아 나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리고 이혼이 능사는 아니니, 잘 생각해 보고 네 남편의 긍정적인 면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해주면서 정말 내가 죽을 것 같이 힘들어야 하는 게 이혼이니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도 트라우마를 상기시키는 것처럼 힘든 일이었지만 힘든 상황에 놓인 친구를 돕기 위해서는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올해 여름, 그녀가 우리 집에 놀러 오고 싶다고 연락을 해왔다. 직장 때문에 내가 올해 고향을 떠나 자연 경치가 아름다운 조용한 지역으로 이사를 왔는데 그녀는 내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때 거절을 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녀가 힘들어서 여행을 떠나고 싶어서 연락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오라고 말했고 터미널까지 그녀를 마중 나갔다. 나는 그녀를 지역 맛집으로 데려가 밥을 사주고, 커피도 사줬다. 그래도 날 보러 다른 지역까지 버스를 타고 온 친구니 대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 집에 데리고 와서 차를 마셨다.


 그러다 결국, 사달이 났다. 그녀는 또 나에게 우리 가족의 근황을 물었고, 그날 그녀의 타깃은 나의 오빠였다. 나는 오빠가 새언니와 별로 사이가 좋진 않지만 그래도 오빠 나름의 방식으로 노력하고 살면서 만족하고 아이를 잘 키우면서 지낸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오빠도 나중에 이혼하겠네."


 뭐라고? 내 귀를 의심했다. 얘가 지금 나를 호구로 본 것인가? 지금까지 내가 그녀를 이해하려고 나의 스트레스를 감내하며 견뎌온 세월이 완전히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날 거실에는 아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고, 내가 기분이 나쁘다고 소리를 지르거나 친구에게 나가라고 이야기를 한다거나 하면 아들도 놀라고 나도 마음이 좋지 않을 것 같아 정말 참을 인을 열 번 새기면서 참고 그 친구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오빠가 알아서 하겠지. 오빠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난 오빠를 존중해. 오빠가 그냥 살든, 이혼을 하든, 오빠가 행복하면 된 거 아냐?"


 그리고 나는 생불 같은 마음으로 그녀를 터미널까지 데려다줬다. 그리고 2023년 12월 말, 그녀에게 온 전화를 받지 않고 메시지를 남겼다.



미안한 말인데 이제 연락 안 했으면 좋겠어.

지난번에 네가 우리 집에 왔을 때 너는 무심코 '오빠도 나중에 이혼하겠네~'라고 말했지.

그 순간 나는 화가 확 치밀어 올랐지만 아이 앞에서 화내기가 싫어서 '오빠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난 존중해'라고 말하고 너를 터미널 앞까지 데려다줬어.

그날 너와 나는 참 다르다는 걸 느꼈어.

얼마 전 내 생일날 너에게 연락이 없는 걸 보고 내가 다행이라고 느끼는 걸 보면서 아, 우리 관계는 여기서 정리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다시 들었어.

네가 연락하지 않는다면 그냥 두려고 했는데 앞으로 연락이 올 때마다 영문도 모르는 널 두고 그냥 안 받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솔직하게 얘기해.

건강하게 잘 지내.

이건 진심이야.



 20여분 뒤, 그녀에게 답장이 왔다. 그녀는 생각 없이 그런 말을 뱉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고 함부로 말을 내뱉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많이 속상하긴 하지만 나의 의견을 존중하겠다고 했다. 그녀에게 나는 꿈도 확실하고 긍정적이고 밝아서 본받고 싶은 친구라고도 이야기했다. 나를 통해 배운 것이 많다는 그녀의 말에 울컥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인연을 잘 마무리하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내가 그 자리에서 참지 못하고 왁, 하고 화를 냈으면 우리는 이렇게 잘 끝내지 못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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