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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가(多情歌)

마음이 어지러워 잠이 오지 않는 밤

by 오후의 햇살

고등학생 시절, 문학 시간에 배운 시조들 중에 유난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


그것은 고려 충신 이조년 님의 '다정가(多情歌)'라는 시조였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 하야, 잠못드러 하노라






배꽃에 달이 밝게 비치고 밤은 깊어 삼경인 때에

나뭇가지에 깃들여 있는 봄의 정서를 소쩍새야 알리가 있으랴마는

다정한 것이 병처럼 되어서 잠을 못 들고 있노라.



..하고 많은 시조들 중에 왜 하필이면 이 시조가 기억에 남는 것일까, 생각해 봤더니 나라는 사람의 성격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생각이 많은 아이였다. 좋게 말하면 다방면으로 생각하고 타인의 입장에서 그들을 배려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너무 생각이 많아서 하지 않아도 될 걱정까지 떠안고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감성이 깊어지는 밤이면 유난히 생각이 많아지고 한 번 생각에 빠지면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아 괴로울 때가 많았다.



그런 나에게 이 시가 운명처럼 다가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다정가(多情歌)를 읽으면 시인의 마음과 시인이 그 당시 보던 풍경이 어떠하였는지가 고스란히 내 머릿속에 그려진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봄밤, 밝은 달빛에 비춰 더욱 하얗게 보이는 꽃들, 그 아름다운 풍경과 정취에 젖어 더욱 생각에 잠기게 되는 시인...






오늘 밤 나는 왜 새벽 3시에 깨어 잠 못 이루고 있을까.


지난 한 달간의 복잡 다난했던 기억, 아직 정리되지 않은 마음, 이러한 것들이 내 안에서 얽히고설켜 도무지 풀어지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내가 힘들 때 나는 오롯이 홀로 견뎌냈고 누군가에게 베푼 나의 관심과 배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그저 흡수되는 무수한 상황들이 있었는데 나는 왜 놓지 못할까.



돌이켜 반추해 보면 나의 연애 패턴은 항상 그래왔다. 잘해주고 싶은 내 마음을 보일수록 상대는 그게 당연해졌고, 처음에는 귀한 보석처럼 나를 대했으나 나중에는 그저 길가에 치이는 돌을 보듯 했다. 결국 변한 그 사람의 모습에 내가 먼저 마음이 떠나 이별을 고했고, 뒤늦게 후회하고 사과해도 나는 차갑게 마음의 문을 닫았다.



나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내가 매달리는 것은 스스로에게 미안할 일이다. 이제는 다 내려놓고 누구보다 나 자신에 집중하고 나 스스로를 더욱 사랑해야 할 때다.


인생을 단순하게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조년 시인의 시조처럼 '다정(多情)도 병인양 하여' 잠 못 이루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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