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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 햇살 Aug 30. 2024

자존심을 건 팔씨름 대결

레전드의 탄생

 오늘 국어시간에 줄다리기에 대한 설명문을 가르치면서 줄다리기는 양쪽에서 끌어당기는 힘을 이용한 경기임을 설명하는데 우리반 힘 서열 1위 L군이 나에게 자기가 힘이 세다며 팔씨름 대결을 신청했다.


 나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선생님은 지금까지 14년 교직 인생 경험 중 5학년 남자애들한테 팔씨름으로 진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하며 그 도전, 흔쾌히 받아주겠다고 말했다.



거기에 덧붙여, 만약 네가 이긴다면 6교시 음악시간을 체육시간으로 바꿔준다고 공약까지 내걸었다. (나의 오만함이여...)

그리고 한 마디 더,


 "아, 그리고 혹시 네가 져도 상처받지 마. 이건 네가 약해서가 아니라 선생님이 세서 그런 거니까. 알았지?^^"

 하면서 빙그레 웃어주며 사람 좋은 미소까지 잊지 않았다.


 교탁 앞에 책상 하나와 의자 두 개를 마주 보게 배치하고, 우리 반 아이들이 다 앞으로 나와서 둥그렇게 선생님과 L군을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나는 기세등등하게 시합을 시작했다.



 


 



...그리고 시작된 팔씨름에서 나는 5초도 안 돼서 L군한테 졌다.


 생각지도 못한 결과에 너무 놀란 나는, 원래 경기는 3판 2승으로 해야 정정당당한 거라는 비겁한 변명을 하며 승리의 기쁨에 포효하고 있는 L군을 황급히 다시 자리에 앉혔다.


 음악이 체육으로 바뀐다는 기대에 부풀었던 아이들은

 "에이~ 선생님이 이겼으면 3판 2승 안 했을 거잖아요~!"

하고 말했다.


 나는 "얘들아, 선생님을 뭘로 보는 거니? 선생님이 이겼어도 똑같이 했을 거야~ 자, 모두 조용! 다시 경기 시작합니다^^"

하며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아이들의 야유와 나의 자존심을 건 승부로 시작한 두 번째 경기..


.

.

.

.


이번엔 2초 만에 졌다.


하.. 호주에서 5킬로 감량하고 왔더니 힘까지 감량된 듯했다.ㅜㅜ


 승부욕이 강한 나는 너무 분해서 옆반 언니 선생님(신장 177cm)을 용병으로 데려왔다. L군에게 네가 그렇게 힘이 세면 2반 선생님과도 한 번 경기해볼래?라고 도발하니 아이는 덥석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후후..)



 2반 선생님은 아이한테 '팔씨름하다 신체적으로 무리가 오면 그만할 것, 혹시 다쳐도 문제제기하지 않을 것'에 대한 동의를 받고 팔씨름을 시작했다. 역시 철두철미한 언니다..리스펙트!






1,2반 아이들이 우리반 교실에 모여 숨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L군과 2반 선생님의 팔씨름 대결이 시작됐다.


 2반 선생님은 응원하는 아이들을 스윽- 여유 있게 둘러보면서 미소를 짓더니 L군을 3초 정도 봐주다가 완력으로 팍!!!!!! 한 번에 넘겼다.


 나는 그때를 틈타 선생님이 2반 선생님이랑 10년 지기 친구라고, 앞으로 너네 말 안 들으면 2반 선생님을 데리고 올 거라고 말했다. (비겁의 극치ㅋㅋㅋㅋㅋㅋㅋㅋ) 귀여운 아이들은 앞으로 선생님 말씀을 더 잘 듣겠노라고 약속했다.



2반 선생님이 나가시고 나서 애들은 자기들끼리 흥분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야, 봤냐? 코끼리랑 개미의 싸움이었어.."

"아니야! 티라노사우르스랑 개미야!!"


 나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목숨의 위협을 받고 싶지 않으면 그 얘기는 2반 선생님 앞에서 하지 말라고..






 그날 점심시간, L군이 나에게 와서 말했다.

"선생님! 저도 우리 농구부 코치님 데려와서 2반 선생님 이겨달라고 할 거예요! 우리 코치님이 이길걸요?"


내가 말했다.

"L군아, 그건 반칙이야..^^ 전직 운동선수를 데려오면 안 되지."


그러면서 아이한테 졌다고 분해서 177센티미터의 옆반 선생님을 데려온 나 자신이 한없이 비겁하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L군아 미안해..^^

그래도 너..

선생님 이겼잖아..

선생님은 아직도 오른손이 바들바들 떨려...



.. 오늘은 판서를 하지 말고 컴퓨터로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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