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상하게도
부모는 미안했던 것만 사무치고
자식은 서운했던 것만 사무친다.
그래서 몰랐다.
내게 허기지기만 했던 유년기
그 허름하기만 한 유년기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만든 요새였는지.
-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중 -
엄마가 영원한 휴가를 떠난 지 1년 9개월째
휴가에서 돌아오지 않을 엄마지만
여전히 내 기억은
나의 삶 곳곳에서 여전히 엄마를 소환한다.
집안에 있는 화초들에 물을 줄 때에도 엄마가 생각난다.
엄마가 살아계셨을 때 엄마가 키우시던 화초들은
8남매를 낳은 다산의 여왕인 엄마처럼
번식력도 좋았고 정말 잘 자라 주었다.
그런 엄마의 손은 늘 무엇인가를 살려내는 신의 손길 같았다.
다 죽어가는 화분들을 엄마집으로 보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 살아나 생명의 에너지를 뿜어낸다.
'엄마 손은 신의 손인가?' 라며 놀래곤 했는데.
나는 화초에 물을 주는 날이면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잘 자라줘서 고마워. 예뻐라.'
생각보다 잘 챙겨주지 못하는데도
화초들 하나하나가 잘 자라고 번식을 한다.
그 말은 마치 나의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말들과 같았다.
늘 부족한 것만 같고 잘 챙겨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
그럼에도 잘 자라준 아이들에게 언제나 진심으로 감사하는 그 마음처럼.
당신의 작고 꼬물꼬물 한 아이들이 다 자라
부모가 되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엄마도 그런 마음이셨을 테지.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누.'
희끗희끗 해진 머리를 쳐다보며 가장 첫째인 딸에게, 둘째인 아들에게 하셨던 말.
'너희들이 나이 먹은 것을 보니, 내가 죽을 날이 가까워 지나보다.'
자식들의 나이 듦은 곧 당신의 죽은 날이 임박해져 온다는 것을
엄마는 그런 식으로 표현하셨다.
자식들에게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시는 날이면
'아이고, 내가 얼른 죽어야는데, 그래야 너희들이 편하지.'라며
미안함과 고마움을 그렇게 표현하셨으리라.
그때는 들여다보지 못했던 엄마의 마음들을 이제야 읽게 되었다.
엄마의 말속에는 푸념이 아닌 언제나 또 다른 마음이 담겨 있었다는 것을.....
엄마는 내게 늘 파스텔톤의 분홍색이다.
언제나 잔잔한 웃음, 들릴 듯 말 듯, 보일 듯 말 듯
엄마의 깊은 진심은
내가 엄마로서 살아가며
나이 들어감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다만, 그 진심이라는 것이 엄마의 진심일지 아닐지 모를
나만의 해석으로.
영원히 다른 곳으로 휴가를 떠난 엄마가
이쪽 세상의 일들을 다 잊고 정말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휴가는 그런 것이니까.
휴가 중에는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 시간 속에서 행복을 누려야 하니까.
자식들 키우며 삶을 살아내느라
한 순간도 편하지 않았을 엄마가
이곳에서 누리지 못했을 고요하고 편안함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시길.
당신이 엄마로서 해야 할 일보다
충분히 차고 넘치게 해내시라 정말 정말 고생 많으셨으니.
어쩌면 '엄마'라는 자리는
사랑, 온기, 기다림으로
감정과 기억,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엄마로 존재하는 한
살아서도 죽어서도 자식들에게 끝없이 디자인되는 존재.
엄마를 보냄으로써
상실의 아픔을 지나온 나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나만의 방법으로 재정의를 해본다.
죽음은 남겨진 자들에게 슬픔일지는 모르겠으나
떠나간 이들에게 삶의 고단함을 내려놓을 수 있는
또 다른 축복일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