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 마블, 아이언 하트, 걸 갑스, 82년생 김지영
필자가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대중문화에 미치는 영향 때문이다. 필자는 영화를 사랑한다.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사랑한다. 좋은 영화는 대체로 중심 메시지를 가지는 편이다. 가족과의 사랑, 우정, 헌신, 역사의 잔혹함 등 영화를 통해 하고 싶어 하는 말이 있다. 하지만 중심 메시지가 영화보다 중요해질 때, 즉 영화보다 하고 싶은 말이 우선될 때 영화는 유치하고 저급해진다. 모든 주선율 영화나 대부분의 페미니즘 영화가 이와 같다.
페미니즘 영화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가진 공통적인 나쁜 메시지 때문이다. 반대 성별로 예를 들면 어떤 감독이 '상남자 영화'라면서 주인공이 만날 여자들 패고 다니는데 맞고 다니는 여자들이 그 주인공 좋다고 매달리는 영화를 만들고 그런 영화를 남자들이 좋다고 보고 좋은 후기를 남기고 서로 인터넷 커뮤니티 가서 영화를 추천하는 글을 쓴다고 상상해 보자. 얼마나 기괴한 광경인가? 이 이후로는 각 작품을 보며 왜 페미니즘 영화를 싫어하는지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원래는 두 작품을 분리할 계획이었으나 두 영화 모두 '슈퍼 히어로' 영화라는 공통점이 커 하나라 묶으려 한다. 우리는 슈퍼 히어로 영화를 좋아한다. 대표적으로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토르가 가장 인기가 많은데 이들과 캡틴 마블, 아이언 하트는 무슨 차이점이 있을까?
바로 '힘'에 대한 취급이다.
대부분의 슈퍼히어로는 힘을 얻기 위해 고생을 한다. 아이언맨은 납치되고, 캡틴 아메리카는 혈청을 맞기 위해 고된 훈련에서 인간성을 증명했으며 토르는 가장 강하게 태어났지만 그 이후로 몇 번의 각성을 위해 태양의 힘을 맞는 등 여러 고생을 하여 힘을 얻었다. 하지만 페미니즘 서사 여성 히어로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 힘은 주어진다. 캡틴 마블에게도 힘이 주어졌고 아이언 하트는 엄청나게 타고난 천재여서 아이언맨 슈트와 여러 가지 기술을 훔쳤다(비꼬는 게 아니라 진짜 훔친다). 이것은 페미니즘이 힘과 권력을 바라보는 태도를 보여주는데 이들에게 힘, 재력, 권력은 쟁취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우리에게 주어져야 되는 권리'로 바라본다. 힘을 얻기 위해 고생하는 과정은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희생'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페미니즘 영화는 이런 과정이 생략되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문제이다.
두 번째 문제가 더 큰 문제인데 바로 이들이 힘을 쓰는 방식이다.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스파이더맨이라는 가장 강하지도 않은 거미줄쏘는 소년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명언 때문이다. 슈퍼히어로와 슈퍼빌런을 구분하는 기준은 힘을 쓰는 방식이다. 히어로는 책임(의무)을 지기 위해 힘을 사용해야 한다. 힘이 그저 주어지는 슈퍼히어로는 남자 중에서도 많다. 슈퍼맨, 샤잠 등 눈떠보니 힘이 생기는 슈퍼히어로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인기 있는 슈퍼히어로가 되는 이유는 그 힘으로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슈퍼맨은 누구보다 희생적이고 샤잠은... 인기가 없다. 행콕마저도 처음에는 사리사욕을 위해 힘을 쓰다 의무를 위해 힘을 쓰며 히어로가 되었다. 캡틴 마블과 아이언 하트는 힘을 통해 무엇을 하는가?
캡틴 마블은 뒤처리를 하지 않는 쿨녀다. 자신의 행동으로 어떤 행성에 전쟁이 일어나도 그냥 떠나고 바다가 없어져도 그냥 떠나고 태양이 꺼져도 그냥 떠난다. 캡틴 마블과 희생, 의무는 거리가 먼 개념이다. 이들이 히어로가 되는 것은 선행을 위한 게 아니라 나쁜 놈들 때리고 싶어서인 것으로 보인다.
캡틴 마블은 어떤 문제가 있어도 그나마 대의를 행하려고 하긴 하는데 아이언 하트는 힘을 통해 도둑질을(놀리는 게 아니라 진짜 말 그대로) 할 뿐만 아니라 국가 요원에게 리펄서 건이라는 살상 무기를 갈긴다. 이 요원이 살면 설정오류고 죽으면 이걸 히어로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힘을 얻게 된 계기부터 천재 + 도둑질인 영웅에게 기대할 부분이 적은 건 알지만 힘을 얻고 나서도 영웅적인 면모를 찾기가 힘들다.
캡틴 아메리카, 아이언맨, 토르, 심지어 가오갤마저도 대의를 행하기 위해 자신들의 힘을 희생하는 데 사용한다. 하지만 페미니즘 서사에서 여성에게 '희생'하라는 말은 평생 집구석에서 밥이나 지으라는 말과 같기 때문에 여성 서사는 절대로 희생하지 않는다. 이것이 페미니즘 슈퍼히어로 영화의 문제점이다.
너무 유치하다.
서울 한복판에서 대낮에 경찰서 앞 도로에 젊은 여자가 서있는데 트럭이 전속력으로 그 여자를 박아 죽이는 장면이 있는 것부터 이것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영화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것에 대해 '코미디 영화면 코미디로 봐라'라고 한다면 나는 코미디 영화에 은근슬쩍 스리슬쩍 사상을 주입하지 말라는 대답을 드리고 싶다.
필자는 82년생 김지영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원작인 책을 많이 읽고 영화의 후기를 많이 봤다. 아마 영화와 책의 차이가 클 거 같진 않으니 책 기준의 얘기를 하겠다.
82년생 김지영을 보며 가장 많이 떠오르는 키워드는 '수동성'이다. 이 책은 3가지 부류의 인간으로 이루어졌는데 김지영, 김지영 주변의 여자, 그리고 김지영 주변의 남자다. 김지영 주변의 남자들은 온갖 종류의 기생충과 범죄자 집단이고 김지영 주변의 여자들은 온갖 재능과 능력과 성실함을 타고났지만 항상 수탈당하는 피해자들이다. 그리고 김지영은 철저한 수동적 방관자이다.
우선 김지영의 가정 이야기부터 말이 하나도 안된다. 엄마가 집안의 모든 일을 다 하고 집안을 일으키지만 남편은 돈만 까먹는 기생충에 사고만 치는 멍청이에다가 엄마가 이룬 일을 자기가 한 것인 거 마냥 자랑하는 한심한 사람이다. 이 대목에서 페미니스트들이 얼마나 멍청한지가 나오는데 그렇게 가부장제가 심했던 조선시대에도 '공처가'라는 말이 있다. 공처가란 '아내에게 기가 죽어 쩔쩔매는 남편'을 일컫는 말로써 이 세상 어떤 시대든 능력 없는 남자가 가정에서 대우받는 구조는 있었던 적이 없다. 심지어 조선시대에도 말이다. 그런데 조선시대도 아닌 80, 90년대에 저렇게 능력 없는 남자가 집안에서 한마디 말이라도 하고 기를 펼 수 있다? 이건 진짜 소설인 거다. 가족이라는 개념을 가부장제를 위한 구조로 보는 페미니스트의 시각으로는 조선시대에 공처가가 있었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김지영이 주인공인 이유는 뭔가. 김지영은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수동적인 방관자다. 김지영 주변 인물들은 외국을 가든 공부를 하든 어떻게든 자신의 인생을 위해 사는데 김지영은 그냥 바람에 떠도는 나뭇잎처럼 자신을 지키지도 않고 문제를 고치지도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탓하는 한심한 존재이다. 심지어 이 이야기의 하이라이트인 '맘충'이란 말을 듣고 무너지는 것조차도 한심하다. 자신이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 한 생명의 창조자라면 책임감을 갖고 그 아이에게 앞날을 지도하며 강하게 살 생각을 해야지 말 한마디에 무너져 피해자를 자처한다면 그 사람은 어머니가 될 자격이 없는 거다. 지나가다 본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게 한 말 한마디가 자신의 남편의 말보다 중요한가? 그걸 넘어서서 그 말 한마디가 자신의 딸 아영이보다 중요한가? 자녀라는 소중한 생명을 키우는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일을 하고 있는 어머니가 자신의 가치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딸, 남편이 아닌 지나가는 사람들이 툭 던진 악의에 두고 있으며, 이것이 받아들여져 공감대를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한심하고 약한 사람이 많은지 보여준다. 지나가던 말 한마디에 무너져 엉엉 우는 게 페미니스트적 자세라면 도대체 김지영은 인간인가 개구리(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는 속담)인가? 소설의 모든 부분이 이해가 안 가지만 특히 이 부분이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다. 김지영은 한 가정의 어머니가 될 자격이 없는 피해망상적 정신병자일 뿐이다(진짜 정신병에 걸린다). 이 소설의 가장 큰 피해자는 김지영의 남편이다.
너무 화가 나 한마디 더 붙이자면 도대체 페미니스트들이 김지영의 남편에게 바라는 게 무엇인가? 지나가던 사람들의 맘충 한마디에 자신의 인생이 다 부정당한 것처럼 집에서 엉엉 우는 개구리를 오구오구 하고 다독이고 챙기고 부둥부둥하고 배려해서 인간으로 만드는 게 남편의 책임이자 의무인가? 인간으로서의 의무조차 다하지 않는 개구리의 몫까지 하는 게 왜 남편의 책임인가? 한 가정의 어머니라는 것은 아이를 보살피고 지켜야 하는 굉장한 책임을 가진 자리다. 책임을 가진 자는 책임을 질 수 있을 만큼 강해야 하는데 김지영은 그런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의무와 권리는 동전의 양면인데 이 소설이야말로 페미니즘이 의무와 책임은 거절하고 권리와 배려는 받고 싶어 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한다.
본인은 안티페미는 맞지만 여혐은 아니다. 어머니와 누나랑도 사이가 좋고 여자친구랑도 잘 연애하다 결혼도 했다.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은 여성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은 공산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에 가깝다. 이다음 글은 좋은 여성 서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