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목소리
집에서 책 읽기 개인과외를 하고 있다.
아이들이 올 때마다 문을 열러 나가기가 귀찮아 현관문을 열어두고 산다.
주말 아침, 수업이 한창이었다.
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중문으로 얼굴을 내미는 한 어르신
"문이 안 열려~"
"네?"
"앞에 우리 집인데 문이 안 열려~"
무슨 상황인가 나가 보았다.
꽃무늬 티셔츠에 밝은 색 바지, 마른 몸.
곱게 화장을 하시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여자 어르신이 당황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가족에게 전화를 한다거나
전화가 없다면 전화를 빌려달라 하거나,
경비실에 문의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그런데 처음 보는 사람에게 "문이 안 열린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앞집 주인을 알고 있지만 혹시 부모님이신가 싶어 초인종을 눌러보시라 했다.
초인종이 여러 번 울렸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여기 205동인데, 맞으세요?"
"우리 집인데 안 열려." 이 말만 되풀이하며 문고리를 잡고 막무가내로 열려고 한다.
그때 뒤에서 우리 학생 하나가 나오더니
"할머니, 여기 아니에요. 저 아시겠어요?"
할머니를 아는 듯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무런 표정변화가 없다.
"할머니, 204동에 가셔야 해요. 여기 205동이에요"
할머니가 동을 헛갈린 모양이다.
다른 동이라고 하면 자신이 '잘못 찾아왔구나'라고 인지하고
'고맙다'. '미안하다' 등의 표현이 있을 텐데
할머니는 '우리 집이 맞는데, 왜 안 열리지?' 하는 표정이었다.
할머니에게 엘리베이터를 잡아드리고 맞은편 쪽으로 가야 한다 설명해 드렸다.
학생에게 아는 분이냐고 물었더니,
"얼굴은 처음 보는데 목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같은 동 할머니예요." 한다
아... 치매구나...
동을 헛갈리더라도 도어록을 보면 잘 못 왔다고 바로 알 텐데..
할머니의 반응을 생각하면 치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가끔 집 비밀번호를 잊어버린다.
익숙한 손끝의 느낌으로 눌렀는데 '삐삐' 아니라는 신호가 울리면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숫자를 떠올리며 꾹꾹 눌러본다.
그래도 안 열릴 때는 머리가 하얘지고 등에 땀이 난다.
숨을 고르고 천천히 생각한다. 다시 누른다.
그제야 문이 열리고 안도감이 밀려오는 동시에
'나 어쩌냐. 비번도 잊어버리네. 큰일이다.' 하며 불안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할머니도 그러지 않았을까..
대단지 아파트라 누가 어디 사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9개월 넘게 살았다.
같은 동 같은 라인의 사람들도 누군지 모른다.
여기로 이사 오고 나서는 인사를 하는 것이 어색하다.
엘리베이터에서 분리수거장에서 입구에서 종종 사람들을 마주치지만
정겨운 인사가 인색하다.
오늘 같은 일이 또 생긴다면 도움을 드릴 수 없다는 게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