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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생활이 떠오르는 아일랜드 정원일..

by 관새로이

난 4주 동안 하루에 6시간, 주 5일 동안 정원일을 해왔다. 그 대가로 숙식을 제공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남들 몇 백씩 초기정착 비용으로 들어갈 때, 나는 거의 한 푼도 사용하지 않았다. 물론 몸이 고생했다..


정원일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일단 허리가 너무 아팠다. 주된 일이 잡초 뽑기나 넝쿨 자르기 등이었기 때문에 허리 숙일 일이 많았다. 그걸 매일 6시간씩 하니까 안 아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해가 안 되게도 나만 아파하는 것만 같아 보였다. 그나마 매일 꽃에 물을 주는 아침 루틴이 있었는데 가장 편안하고 좋았던 시간이었다.

군생활을 떠오르게 하던 작업

허리 통증보다 더 힘들었던 건, 정원일은 너무나 지루한 일이었다.

아일랜드에 도착하자마자 잡초를 뽑고 있는 나 자신이 적응도 안 되고 현타가 오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잡초를 아무리 뽑아도 시계를 보면 10분 정도 지나있었다. 시간이 그렇게 안 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영어도 딸려서 불편하고 친구도 없고 내 주위의 모든 환경은 낯설고 불편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나는 묵묵히 일했다. 그 당시 작업 영상을 보면, 마치 범죄 현장을 정리하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다.

범죄현장 아님


잡초를 뽑고 나무를 자르고 정글 같이 무성한 나무들 사이 속 가시나무를 잘랐다. 또 무더운 햇빛 아래 담벼락에 올라타 넝쿨도 제거했다. 기억에 남는 작업은 호박이나 꽃을 심었던 꽤나 넓었던 밭이 있었는데 그 밭 전체를 소가 된 것 마냥 모두 갈아엎었다. 그 일을 마치고 나선, 올리브도 기뻐했던 얼굴이 기억에 남는다. 비록 영어는 잘 못했지만 열심히 했다고 인정받은 것아 뿌듯했다. 난 정말 군생활을 다시 하는 듯했다. 아니 내 군생활보다 이런 막노동은 더 많이 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ROKA티를 입고 해서 그런 느낌이 더욱 강했다.

소가 밭 가는 기분 알았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버티게 해 준 존재가 있었는데 그건 올리브가 키우는 댕댕이 덕분이었다. 그 귀여운 존재들은 내가 작업할 때마다 넓은 풀밭을 돌아다녔고 그중 한 댕댕이는 나를 볼 때마다 반갑게 인사해주곤 했다. 그 댕댕이들 나에게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다. 하루를 마치고 마시는 맥주도 하나의 낙이었다. 아일랜드 여름은 1년 중 가장 좋은 시기라 시원한 밤날씨에서 오는 솔솔한 바람을 맞으며 마시는 기네스는 기가 막혔다. 일을 마치고 운동도 자주 해서 그런지 항상 기분 좋은 숙면을 취했었다. 이런 소소한 행복들은 지금 추억이 되었다.


아쉬웠던 점도 하나 있다. 당시 가져온 옷과 신발을 그냥 막 입었었는데 그때 묻었던 수액과 얼룩짐이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았다. 특히 아일랜드를 위해 방수 나이키 신발을 특별히 사 왔었는데 작업하는 내내 신곤 했다. 그러다 나중에는 신발 수명이 금방 끝나서 너덜너덜한 채로 다니기도 했다.

귀여운 댕댕아


어쨌거나 언제나 그렇듯 이런 단순한 육체노동은 나에게 깨달음 주었다. 정말 성공해야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게끔 만들었다. 난 그곳에서 그냥 외국인 노동자 그 자체였다. 이방인의 마음이란 어떤 것인지 절실히 알게 되었다. 언제까지나 이런 단순노동으로 내 묻혀 있는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며 살 순 없다며 말이다. 이런 굳센 마음으로 내 목표를 위해 하루하루 버텨냈다.


그래서 쉬는 날이면, 최대한 알차고 생산적인 일을 하려고 노력했다. 먼저 한국에서 미리 예약해 놨던 거주증을 발급하기 위해 이민국을 자주 오고 가곤 했다. 아일랜드는 행정처리가 매우 오래 걸리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특히, 무슨 이유인지 우편을 좋아해서 뭐만 하면 우편으로 주고받아서 더 오래 걸렸다. 그래도 나는 지금 돌아보면 운이 좋았다. 난 내가 원하는 날짜를 정해서 예약을 잡을 수 있었고, 아무 딜레이 없이 순조롭게 진행했다.

지금도 보고싶은 댕댕이

그런데 나는 이런 몇 주간의 외노자의 삶이 이어지면서, 무언가 허전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보통 아일랜드에 오는 한국인들은 어학원을 다니며 홈스테이를 하며 초기정착을 한다. 그 기간 동안 계속 지낼 집과 일을 구하는 것이다. 또 어학원을 통해 많은 친구를 사귀거나 추억을 쌓곤 한다. 그런데 나는 아일랜드에 오자마자 정원일로 시작했으니 어디 친구 사귈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 끝에, 언어교환 모임을 나가기로 했다. 어 실력도 부족했고, 친구도 사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 용기를 주는 특별한 사건을 만들고 싶었다.

살면서 한 번도 이런 모임에 나가본 적이 없었다. 가기 전부터 불편하고 꺼려졌지만, '나도 모르겠다' 하고 참석 버튼을 꾹 눌렀다. 그게 뭐든 더 이상 후회하기 싫었다.


그게 이번에 다가오는 수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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