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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는 잘 못해도 잡초는 잘 뽑습니다

아일랜드 가자마자 잡초 뽑는 남자 (2)

by 관새로이

잡초만 오지게 뽑은 지 몇 주가 지났다.

내가 여기서 4주 동안 정원일을 하며 초기정착을 위해 있었던 시간들은

내 아일랜드 인생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왜냐하면, 정말 힘들었던 시간들이었다.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속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아일랜드 땅에 난 혼자였기에 그 누구도 내 상황과 감정을 이해하기 힘들고 나의 고충들을 어디로부터 해소하기 어려웠다.


이 집에 처음 발을 들일 때부터 느꼈지만, 역시나 영어가 나의 자존감을 열심히 깎아먹었다.

호기롭게 출발했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일을 하면 할수록 말 꺼내기가 조금씩 두려워졌다.

보통 나는 올리브에게 무슨 일을 하면 좋을지 물어보곤 했는데 올리브는 나에게 날마다 몇 가지 일을 주었다.

나에게 어려운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이것 좀 해줄래' 등 짧고 간단한 지시 또는 질문들을 했다.

그런데 그게 불행히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매번 일을 시작할 때면, 몇 번씩 되묻기 일쑤였고

때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그냥 넘어가기도 했다.

한 번은 조나단에게 이런 내 상황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는 “못 알아들으면 꼭 다시 물어봐. 그게 더 나아. 괜히 더 큰일 생기지 않게.”라고 진지하게 말해줬다.

슬프게도 조나단과 이야기할 때도 여러 번 묻는 게 일상이었다.


그 뒤로는 최대한 다시 묻고 확인하려고 노력했지만, 정말 여러 번 같은 걸 반복해서 물어보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올리브와 함께 일할 때면 점점 말 걸기가 조심스러워졌고,

그녀도 나와 잡담을 하는 일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영어로 인해 일어난 이런 상황들이 참 속상했다.


또 다른 문제는 '마크'였다. 마크와는 정말 한마디도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마크는 말도 길게 하지 않았고 여러 번 되물어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일랜드에서 살면서 가장 어려웠던 상대였다.

그래서인지 마크와의 일화도 한두 개가 아니다.

낯부끄러웠던 한 가지 일화가 있다.

나는 정원일을 하는 대가로 숙식을 제공받기 때문에, 내가 음식이 필요할 때마다 마크와 함께 장을 보러 갔다. 이 날도 어느 때처럼 마크와 장을 보러 둘이 차를 타고 나갔다.

당연히 차 안에서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 아는 것이다..

문제는 계산 직후였다.


마크가 어쩐 일인지 카드를 놓고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카드를 가지고 올 테니 기다리라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차에 두고 왔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계산대 앞에서 기다렸지만, 시간이 지나도 마크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아, 마크가 차 타고 카드 가지고 오는 거구나' 생각했다.

그래도 마크가 모습을 보이지 않자 나도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껴 밖으로 나가봤다.

알고 보니 마크는 차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크는 나 아닌 다른 사람들도 정말 듣기 어려운 영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난 이 순간 부끄러운 나의 영어 실력을 체감했다.


그래서 차를 타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근데 무슨 이유인지, 마크가 다시 마트로 돌아가지 않았다.

마크가 오늘 새로 오는 동료가 올 거라고는 했는데 데리러 가는 건지 뭔지 어떤 계획인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혼자 속으로 꽁꽁 추리하기 바빴다.

마크가 일단 집에서 기다리라고 하자 괜히 초조한 채 앉아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나를 다시 불러서 마트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도 내 예상과 달랐다.

그런데 몇 분 뒤, 마크가 나를 부르더니 트렁크에서 내가 고른 음식들을 꺼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스위스에서 온 새로운 동료도 함께 차에 타고 있었다.

알고 보니, 마크는 그 친구를 데리러 간 김에 내 음식까지 같이 사 온 것이었다.

나는 마크와 몇 시간 동안 같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이게 얼마나 소통의 어려움으로 인한 슬픈 일인가.


영어는 그렇다 치고,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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