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관
어린 시절, TV에서는 ‘뿌리(Roots)’라는 미국 드라마를 방영해 주었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와 노예로 살아야 했던 흑인 ‘쿤타킨테’의 일대기는, 세월이 흘러도 그 이름만큼은 뇌리에 선명히 박혀 있었다.
그리고 내 군 생활 속에도 ‘쿤타킨테’가 있었다. 강원도 철원 오지에 위치한 유격 훈련장. 각 부대에서 차출된 10여 명의 조교들이 상주하던 그곳에, 갓 일병 계급장을 단 녀석이 나타났다. 강원도 출신으로 산과 들을 제집처럼 누비던 그는, 긴 팔다리와 다부진 체력으로 유격 조교 임무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했다. 여름날 막사에 뛰어든 개구리를 산 채로 입에 넣고, 바위산의 뱀을 잡아 튀겨 선임들에게 상납하는 기행(奇行)을 일삼던 그에게 ‘쿤타킨테’라는 별명은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렸다.
반면, 신입 병사 시절 나는 ‘고문관’이었다. ‘고문관’이라는 말은 요즘 말로 관심병사라는 것이다. 군대라는 시스템은 나처럼 체력이 부실한 도시 출신에게는 거대한 시련이었다. 10km 구보에 낙오하여 ‘고문관’이 되었고, 삽질 서툰 솜씨는 늘 선임들의 눈총을 샀다. ‘쿤타킨테’가 야생의 강인함 그 자체였다면, 나는 부대에 적응 못 하는 나약함의 상징이었다.
그날도 철원의 여름은 뜨거웠다. 유격 훈련이 없는 휴일, 조교들은 막사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거나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때, 부식을 공급하는 포병부대의 지프차 한 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막사로 올라왔다. 면회객 하나 없는 격오지에 의외의 방문객이었다.
“누구야? 뉘 집 애인이라도 왔나?”
모두의 시선이 차에서 내리는 사람에게 쏠렸다. 그리고 우리는 순간 숨을 죽였다. 차에서 내린 것은, 이 거친 산골의 풍경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눈부시게 아리따운 여성이었다. 수십 년이 지나 미화된 기억이 아니라, 당시 막사의 모든 조교들이 넋을 잃고 바라볼 만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녀가 수줍게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쿤일병’… 아니, 김일병 님 계신가요?”
막사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은 잠에서 막 깨 부스스한 얼굴로 걸어 나오는 ‘쿤타킨테’에게로 향했다. 개구리를 씹고 뱀을 튀기던 그 야생의 사나이가, 그 아리따운 여성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쑥스럽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 비현실적인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문득 내가 왜 이곳에 그와 함께 있는지에 대한 기막힌 역사를 떠올렸다.
나는 ‘고문관’으로서 유격 조교는커녕, 하루하루 부대 생활을 버텨내는 것조차 벅찼다. 그러던 어느 날, 유격대로 지원한 소대 선임이 휴가를 나갔고, 마침 보초 근무를 마치고 내무반에서 쉬고 있던 내가 여단 간부의 눈에 띄었다. “임시로 2주만 다녀와라.”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유격 훈련병으로 끌려갔다.
‘고문관’이 유격 훈련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였다. 하지만 10개월 차의 짬밥이 만들어준 최소한의 체력과 ‘군인 정신은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나는 그 힘든 훈련을 악으로 깡으로 버텨냈다. 그리고 훈련이 끝났을 때, 나는 어이없게도 3명을 뽑는 유격대 상설 근무 요원으로 선발되었다. 고소공포증이 있던 나는 보란 듯이 외줄 코스 담당 조교가 되어, 1년에도 수십 번씩 외줄 타기 시범을 보이며 군 생활의 정점을 찍었다.
‘뿌리’의 쿤타킨테는 노예상인들에게 포박되어 원치 않는 삶을 강요당했다. ‘고문관’이었던 나는 휴가 간 병사의 대타로 끌려가 내 적성과는 아무 상관없는 유격 조교가 되었다. 내 인생의 이 기막힌 반전이 과연 나의 ‘선택’이었을까?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네가 선택한 인생이잖아.” 하지만 의지나 체력, 배경이나 환경이 나를 그 자리로 내몰았던 것은 아닐까. 선택을 강요받은 수많은 쿤타킨테들에게, 당신의 선택일 뿐이라는 말은 얼마나 무심하고 잔인한가. 어쩌면 우리의 삶이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놓인 길 위에서 최선을 다해 걸어가는 여정일 뿐인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끌려온, 이 요지경 같은 세상의 슬픈 포로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미녀와 야수’의 엔딩은 어떠했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우리의 동화는 동화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