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는?!
어떤 도시든 어떤 인물이든, 처음 마주한 친절과 미소는 그 여정의 절반을 성공으로 이끈다고 믿는다. 내게 파리는 실패한 여정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영화 <향수> 속 지저분한 18세기의 모습이 21세기에도 유령처럼 떠도는 듯, 뒷골목의 오묘한 냄새와 무심한 종업원의 표정은 조상이 남겨준 아름다운 건축물의 감동을 지워버렸다. 심지어 4성급 호텔 로비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 내 아이폰은, 그 도시에 대한 기억에 값비싼 마침표를 찍어주었다.
반면, 90년대 초 처음 방문했던 일본의 청결함은 충격에 가까웠다. 시골길마저 먼지 하나 없을 것 같은 깨끗함, 수시로 허리를 굽히는 사람들의 과도한 친절은 어색할지언정 불쾌하지는 않았다. 이탈리아 역시 지저분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의 얼굴에 걸린 꾸밈없는 미소와 유쾌함은 도시의 모든 단점을 덮고도 남았다. 특히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 끝에서 ‘짠’하고 나타난 피렌체의 두오모를 처음 보았던 그 경이로운 순간은, 그 도시 사람들의 미소와 함께 내 기억 속에 가장 향기로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결국 한 장소를 좋은 기억으로 남기는 것은 화려한 외관이 아니라, 그곳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태도’인 것이다.
얼마 전 단골 식당에 갔다가 흥미로운 광경을 목격했다. 한 손님이 배달 앱 리뷰를 보며 사장님과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사장님, 이 리뷰 좀 보세요. 어떤 손님이 비계 삼겹살 받았다고 별점 1점을 줬네요. 사진까지 찍어서 올렸어요.”
사장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내가 미쳐. 그날 바빠서 미처 확인을 못 했더니… 전화라도 주시지, 이렇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시나.”
예전 같았으면 그냥 ‘똥 밟았다’ 생각하고 넘어갔을 일이다. 소위 ‘갑질’하는 손님에 대한 비판은 많았지만, 대가에 못 미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가게의 ‘횡포’는 그저 운 나쁜 손님의 푸념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스마트폰을 든 모든 손님이 잠재적인 감시인이자 고발자가 된 세상이다.
“무서운 세상이야.”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사장님이 대꾸했다. “무섭긴요. 정신 바짝 차리게 되죠. 어찌 보면 이게 맞는 겁니다. 돈 받고 장사하는데, 제대로 해야지.”
그의 말은 총기 소유가 자유로운 나라의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더 예의 바르다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리뷰의 총알’이, 모두를 조금 더 긴장하고 배려하게 만드는 것이다. 비계 삼겹살이든, 터무니없는 숙박요금이든, 이제 을(乙)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갑과 을의 경계가 흐릿해진 세상. 어쩌면 우리는 조금 더 공정한 시대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파리의 무심함과 피렌체의 미소, 그리고 갑과 을의 역전을 생각하다 보면, 결국 시선은 나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나는 타인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을까.
겉과 속이 다른 사람과 사회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많을 수 있다. 나 또한 늘 겉과 속을 일치시키며 살았다고 자신할 수 없다. 가능하면 진실에 가까운 삶을 살고자 애썼지만, 나의 인연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의 뚱한 표정이나 무심한 태도가 누군가에게는 파리의 악취처럼 불쾌한 기억으로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들에게 조용히 사과를 건넨다. 당신이 마주했던 나의 뚱한 표정이 나의 진심은 아니었을 수 있다고,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느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라고.
결국 좋은 사람이 좋은 장소를 만들고, 좋은 태도가 좋은 관계를 만든다. 기회가 닿는다면 나는 이탈리아에 다시 가보고 싶다. 피렌체의 미소를 다시 한번 마주하고, 그 따뜻함을 배워오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나 또한 ‘피렌체의 미소’ 같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냉정과 열정사이’라는 일본 영화가 떠오른다. 피렌체 두오모는 고소공포증으로 결국 못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