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그리고
‘삶의 의미’. 나는 이 단어의 조합이 늘 놀랍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져, 유년기와 청년기를 지나 노년을 바라보는 지금까지의 모든 시간의 총합이 ‘삶’일진대, 거기에 ‘의미’라는 꼬리표를 붙여야만 하는가.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속 주인공들은 정처 없이 ‘고도’를 기다린다.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가 어쩌면 우리가 평생을 찾아 헤매는 ‘삶의 의미’는 아닐까. 어제가 있어 오늘이 있고, 오늘이 있어 내일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막연한 기다림 속에서 각자의 무대를 살아갈 뿐이다.
늦은 밤, 적막을 깨고 휴대폰에 카톡메시지 알림. 오랜 인연인 친구 녀석이었다. 그는 항상 나를 ‘벗’이라 부른다.
“벗, 잘 지내나. 오늘도 의미 없는 시간을 보냈다. 술을 엄청 마셔도 머릿속 번뇌가 가시질 않네. 젠장.”
나는 그의 굽은 등을 떠올렸다. 학창 시절에도, 한 직장에서 정년퇴직할 때까지도, 늘 누구보다 성실하고 치열했던 녀석이었다. 그런 그가 매일같이 ‘의미 없음’의 지옥을 겪고 있었다. 갑자기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강제로 내려온 배우처럼, 그는 이제 무엇을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채 방황하고 있었다. 나의 친구는, 술에 취한 블라미디르이자 에스트라공이었다.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힘내라’는 말은 무책임하고, ‘다 그런 것’이라는 말은 오만하게 들릴 터였다. 고민 끝에, 내가 아는 유일한 처방전을 문자로 보냈다.
“일만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다 내려놓고 그냥 걸어라. 아니면 자전거라도 타고 혼자 훌쩍 떠나라. 길 위에서는 의미 같은 건 생각나지 않더라.”
답장을 보내고 나니, 얼마 전 자전거를 타고 국토종주를 함께했던 다른 친구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한 사람은 아흔의 노모와 팔순의 장모를 모시고 산다, 며칠 밤낮의 노모 병구완 끝에 졸도하여 앞니가 다 부서졌다. 그는 스스로를 ‘이빨 빠진 개우지(아기 호랑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삶의 의미는 어머니의 늙어가는 시간과 단단히 묶여 있었다.
또 다른 사람은 예순이 넘은 아들이 걱정되어 매일같이 안부 전화를 거는 아흔 넘은 부모님을 모신다. 며칠간의 자전거 종주 중에도 그의 휴대폰은 쉴 새 없이 울렸다. 그의 삶의 의미는 아마도 ‘아직은 걱정할 아들이 되어드리는 것’ 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삶은 위대하거나 찬란하지 않다. 오히려 고단하고 처절하다. 하지만 그들은 ‘의미 없음’을 한탄할 겨를조차 없이, 병든 부모와 늙어가는 자신이라는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었다. 그들의 고단한 분투 앞에서 ‘삶의 의미’라는 질문은 너무나 사치스럽고 공허하게 느껴졌다.
내가 보낸 메시지 옆의 ‘1’은 금세 사라지지 않았다. 만취한 친구라 아마도 그 읽음은 늦어질 것이다. 하지만 밤이 깊도록,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밝아오도록 그에게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길 위에서 위로를 얻는 것은 나의 방식일 뿐, 모두의 처방전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어쩌면 모든 것을 내려놓을 힘조차 없는 그에게, ‘훌쩍 떠나라’는 나의 조언은 얼마나 무심하고 폭력적인 위로였을까. 나의 섣부른 처방전은 그의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각자의 고도를 기다리며, 서로에게 닿지 않는 문자를 보내는 외로운 존재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의 침묵은, 그 어떤 절규보다 더 아프고 선명하게 그의 고통을 내게 알려주고 있었다. 삶의 의미란, 어쩌면 이처럼 서로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